지워진 나

새로운 기법

by 하히호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아이들 어린이집이 끝나고
집에 와 짐을 놓고,
간식을 챙겨주고,
버스를 타고


아이들과 문화센터에 가
방송댄스를 하고,
끝나고 아래층 마트에서 장을 봤다.


오늘 하루의 유일한 차이라면
친정어머니 없이
아이들과 나,
셋뿐이라는 것.


아이들을 카트에 태우고
나는 한국인답게 음을 붙여

혼잣말처럼 흥얼거렸다.


“이건 반찬~”
“이건 간식~”
“이건 할미 거~”
“이건 아빠 거~”
“이건 첫째 거~”
“이건 둘째 거~”


누가 들으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 같지만
철저한 혼잣말이었다.


까먹지 않으려는
머릿속 메모,
나만의 체크용 노동요였다.


그렇게 나는
가족에게 필요한 것들을
빠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집중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카트 안 아이들 무릎과
빈자리에 가득 찬 물건들을 보며
왠지 모르게

든든한 아이템을 얻은 사람처럼
뿌듯해졌다.


“자, 아가들.
이제 계산하고 가자.”


결제대로 발걸음을 돌리던 그때,


의문이 가득 담긴 작은 목소리가
툭,
나를 멈춰 세웠다.


“엄마.
엄마 거는…?”


“왜 다른 가족 거는 다 있는데
엄마 거는 없어?”


“…응?”


아이들의 질문은
내 머릿속에
단 한 조각의 피스도 없던 생각이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 순간에도 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이
제일 괜찮을지를
퍼즐 맞추듯 고르고 있었다.


“엄마는 괜찮아.”


“오늘은 엄마가 필요한 게 없어.”


“생각해 줘서 고마워.”


내 솔직함을 가장한
주책의 말이 섞일까 봐,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가장 착한 말들만
머릿속에 나열했다.


하지만
진짜 답은 달랐다.


괜찮고 안 괜찮고의 문제가 아닌
내 머릿속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한참을 고르고 담았는데
그 안에
나 개인의 몫은 없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는 사실과
별것 아닌 일상의 작은 장면이라는 점이
새삼 와닿으며
묘한 서러움과 덤덤함이
섞이지 않은 채
물과 유화물감처럼
그대로 공존하고 있었다.


반면,
정말 괜찮다고 느끼는
나 자신에게는
조금은 화가 났다.


참,

복잡한 인간이다.


요즘 들어 알게 된
나라는 사람의 한 모습은
내 것을 사고 받는 것보다
가족의 것을 고르고
챙겨주며 느끼는 설렘이
더 큰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괜찮았던 걸까.


하지만
그날의 감정은
그것과는 달랐다.


나는
아예
나 자신을
지워버린 상태였다.


그저 나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그런데 그날,
내 아이들이
‘나’를 기억해 주었다.


내가 나를 지운 자리에서
아이들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를 다시 그려주었다.


스스로에게 느꼈던
울컥한 한 아주메의 서러움은
어느새
물과 물감을 나누는 마블링이 아니라
하나의 기법으로 새로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잠시 나를 잊은 이 시기도
내 일생의 전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를 새기는...


[새로운 기법의 한 시기일 뿐이라는 것.]


그 후로

나는..
지켜보는 아이들이 속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복잡한 인간인 나를 위해
음료 한 캔이라도
내 몫을 산다.


작지만
분명한
‘나’의 자리로...




“엄마야,
엄마는 우리의 전부라
지울 수 없는 존재예요.”



'육아와 나'편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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