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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쌤 Aug 11. 2023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희망이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오는 길에 우리 반 남학생 A가 나를 붙잡고는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우측보행 하라는 말이 욕먹을 만한 일인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되물으니 A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준다. A가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 길에 옆 반 남학생 B가 자기 멋대로 가길래 B에게 '우측보행 해!'라고 말을 했는데 B는 오히려 손가락욕을 자기에게 했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나는 A에게 B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고 한 후 B를 찾아다녔다. 마침 남자화장실에서 장난을 치다가 나오는 B와 마주쳤다. B보고 잠시 있으라고 하고 나는 큰 소리로 교실에 있는 A를 불렀다. A가 도착한 후 나는 A에게 말했다.

"아까 있었던 일을 B도 들을 수 있게 말해주렴."

A가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하니 B가 억울하다는 듯이 발끈하며 말했다.

"야, 나는 그냥 '그만해!'라고 말만 했어. 손가락 욕은 안 했다고"

말이 느린 A는 그 말을 듣고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 아까 분명히 한 것 같았는데..."

말주변이 없는 A가 머뭇거리며 말하는 동안 B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기는 그런 적 없다며 나에게 결백함을 호소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내가 말했다.

"B야. 네가 진짜로 이번에 A에게 손가락 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사실 나는 못 봤기 때문에 알 순 없단다. 그런데, 너 평소에 손가락 욕 쓴 적이 한 번도 없니? 그런 욕 잘 안 써? 그렇다면 네 말을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너희 반 애들이랑 우리 반 애들 모두 불러서 네가 평소에 그런 손가락 욕을 많이 쓰는지, 잘 안 쓰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래서 애들이 너에 대해 '그런 욕 쓸 애가 아닌데요?'라고 말하면 네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A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지. 어때?"

나의 말을 듣고 있던 B는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자. 평소에 손가락 욕 많이 쓰니? 아니면 전혀 안 쓰니?"

B의 표정에서 난처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B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써요."

"그렇구나, 그러면 네가 손가락 욕을 했다고 A가 생각할 만하겠네. 평소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네가 다른 행동을 했더라도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지 않겠니?"

"네."

  그리곤 손가락 욕의 의미를 아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답하는 B에게 장황하게 손가락 욕의 뜻에 대한 이야길 해주며, 이제 뜻을 알았으니 앞으론 손가락 욕을 쓰지 말라고 약속을 받은 후 B를 교실로 보내주었다. A도 충분히 해결되어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교실로 돌아갔다.


아마 B는 A에게 손가락 욕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도 했을 테고.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말을 우기진 않았다. 자기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과 거기에 대한 부끄러움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만약 부끄러운 줄 몰랐다면 끝까지 자기는 결백하다며, 평소 욕도 안 쓴다고 우기지 않았을까.  내가 다른 친구들을 불러서 물어봤더라도 '내가 언제?' 하거나 '네가 잘못 본 거야. 이 손가락이 아니고 요 손가락이었거든?' 하며 적반하장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B는 그러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끝까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봤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위대한 과학자가 되거나, 훌륭한 기업인이 되는 등 흔히 생각하는 거창한 성공을 거두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소박한 교육 목표는 다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하는 것뿐이다.



202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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