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4.
첫 번째 장례
중학교 2학년 여름 큰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때가 나의 첫 번째 장례식 이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동네에서 오토바이를 타시다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 암이 발견되었다. 1년 정도를 대학병원에 계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인이 암이라는 것에 대해 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아빠와 아빠, 작은 삼촌은 누가 봐도 형제지간이라고 생각할 만큼 똑 닮았었다. ‘욱’ 하는 성격도 닮아 만나면 항상 마무리는 큰소리였던 것 같다. 큰아빠가 1년간 계셨던 병원이 우리 집 근처라 아빠가 자주 방문하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한번 은 아빠가 큰아빠와 목욕 간 이야기를 했다. “그때 우리형님 복수로 배만 뽈록하고 팔다리가 말랐었지”라며 이야기 하셨는데 참 짠했다.
무더웠지만 평범한 날이었다. 아빠의 전화 목소리도 보통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큰아빠 돌아가셨으니 사천으로 가자” 사천 큰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도 아무렇지 않으셨다. 전통방식으로 진행된 장례였다. 큰집에 도착하니 마당에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방으로 가니 큰아빠가 관에 누워계셨고 사촌 형들이 삼베옷을 입고 한쪽에 서있었다.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아빠의 울음이 터졌다. 그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그 방에 있던 모두의 울음이 터졌다. 울음이 그치고 선풍기를 추가로 어디에 놓느니 이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일상적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 장례를 치러봐서 이러한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계속 울고 있어야 하는데 다들 왜 이러지’
조문객이 올 때 마다 ‘아이고 아이고’를 하며 조문객을 맞이했다. 3일이라는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지금도 신기한 것이 큰집 마당에는 항상 짖는 개 두 마리가 있었는데 상중 단 한 번도 짖지 않았다. 출상하는 날이 되었다. 내가 큰아빠의 영정을 들고 뒤에 사촌형들이 지팡이를 짚고 마을사람들이 관을 매고 마을 선산으로 올랐다. 집을 나설 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하지만 좀 가다보니 무덥던 날씨 때문에 눈물보다는 땀이 흠뻑 흘렀다. 집에서 선산이 차로 10분 거리였는데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다 중간에 도시락도 먹었던 것 같다.
선산에 도착해서 전통방식으로 관을 누이고 흙을 뿌렸다. 봉이 완성되었고 제를 올렸다. 다른 선산이라 고갤 들어 보면 친 할아버지 묘가 눈에 들어왔었다. 잔디 없이 흙으로만 된 무덤이 그렇게나 쓸쓸해 보였다. 무사히 장례를 잘 치르고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잠들었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장례식장을 어설픈 걸음으로 돌아다니던 사촌형의 아들 모습과 오늘 우리 아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오래전 큰아빠의 장례가 생각이 났다. 아기라 하루 종일 장례식에 있을 수 없어 나랑 아들은 광주 이모님 집에 있다 중간에 잠시 장례식장을 들렸다. 상심 속에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 아들이 “할부지” 하고 달려가 안겼다. 안겨있다 뭘 아는지 아들이 증조할아버지 사진이 놓인 쪽을 기웃기웃 다음에 아버님이 증조할아버지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아내의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하며 먼 길 가시는 증조할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나와 아내가 절을 하자 아들도 절하듯 넙죽 엎드렸다.
장례를 치를 때 마다 많은 생각이 든다. 한해 갈수록 이제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두렵다. 언젠가 먼 훗날 사랑하는 이들을 보낼 때 좋았던 기억이 가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