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나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의 '행간'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편이다. 상대가 굳이 말로 뱉지 않아도, 복잡한 추리를 거치지 않아도 공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싶은 순간들은 대체로 나의 '설마'가 맞았다며 내 직감의 손을 들어주었다. 상대방의 평범한 말과 행동 속에 꽁꽁 숨긴 의도를 애써 모른 체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이성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려 해도 이미 직감이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 경보를 울려댄다. 내 직감은,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경보시스템인 셈이다.
이 능력은 얼핏 본다면 축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때로 저주로 돌아오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속사정까지 자연스레 헤아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저 느껴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이 내가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에서 가차 없이 후순위로 밀려난다는 것과 같다.
분명히, 사람의 속사정을 헤아려 주어야 할 필요는 있다. 나를 스쳐가는, 내가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되도록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조금씩 넓히기 위해서였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처세였다. 그렇지만, 때로 내 직감이 사람의 행간을 가볍게 읽어보라고 던져주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는 다르다. 알고 싶지 않은 행간이 폐부 깊숙이 돌덩이처럼 들어차 숨을 턱 막히게 할 때, 한순간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조금은 특별한 나의 능력에 저절로 따라오는 저주를 막아내고 오로지 축복만 취하려면, '무해하게' 단호해져야 한다. 내 직감이 사람의 행간을 읽어내도록 내버려 두되, 내가 크게 아프지 않을 수준까지만 허용해야 한다. 사정을 헤아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사람의 행간에 달린 무게에 짓눌려서 버티지 못하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먼저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어야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법이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간호하기 쉽지 않듯이 말이다.
이제는, 무해하게 단호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