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단호함

by 문하현

유별나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의 '행간'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편이다. 상대가 굳이 말로 뱉지 않아도, 복잡한 추리를 거치지 않아도 공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싶은 순간들은 대체로 나의 '설마'가 맞았다며 내 직감의 손을 들어주었다. 상대방의 평범한 말과 행동 속에 꽁꽁 숨긴 의도를 애써 모른 체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이성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려 해도 이미 직감이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 경보를 울려댄다. 내 직감은,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경보시스템인 셈이다.


이 능력은 얼핏 본다면 축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때로 저주로 돌아오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속사정까지 자연스레 헤아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저 느껴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이 내가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에서 가차 없이 후순위로 밀려난다는 것과 같다.


분명히, 사람의 속사정을 헤아려 주어야 할 필요는 있다. 나를 스쳐가는, 내가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되도록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조금씩 넓히기 위해서였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처세였다. 그렇지만, 때로 내 직감이 사람의 행간을 가볍게 읽어보라고 던져주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는 다르다. 알고 싶지 않은 행간이 폐부 깊숙이 돌덩이처럼 들어차 숨을 턱 막히게 할 때, 한순간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조금은 특별한 나의 능력에 저절로 따라오는 저주를 막아내고 오로지 축복만 취하려면, '무해하게' 단호해져야 한다. 내 직감이 사람의 행간을 읽어내도록 내버려 두되, 내가 크게 아프지 않을 수준까지만 허용해야 한다. 사정을 헤아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사람의 행간에 달린 무게에 짓눌려서 버티지 못하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먼저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어야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법이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간호하기 쉽지 않듯이 말이다.


이제는, 무해하게 단호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