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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때가 오면,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까.

by 문하현

-이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으셨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안락사' 또는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씩은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뿐, 스스로 적극적인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이러한 배경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중'에게 있어 평생 다시는 볼 일도, 결단코 찾아보고 싶지도 않을 '상연'이 문득 은중에게 찾아와 스위스로 '존엄사 여정'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한다.


마지막 화에 은중은 상연의 부탁을 겸허히 받아들여 함께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은중과 상연 모두 서로에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벽'이 되었었지만, 은중은 상연의 마지막 부탁만큼은 '나를 공격하는 벽'이 아닌 '이해와 수용의 시작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여행에서부터 상연이 스스로 밸브를 열어 약물이 주입되면서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서서히 빠져들 때까지 은중은 상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죽음'은 언제나 남겨진 자들의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모르면서도 잘 알고 있다. 죽음은 남겨진 자들만이 온전히 겪는다. 남겨진 자들만이 말할 수 있다. 남겨진 자들만이 아파한다. 만약, 나를 알던 사람이 갑자기 존엄사로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며 옆에서 끝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나는 그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누군가가, 나아질 수 없는 병에 걸려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아낸다고 상상해 보자. 사실 상상하는 일조차 너무 괴로운 일이고, 상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이 내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니 한 번쯤은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의 입장은, 생생한 현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떠나지 말라고, 조금만 더 옆에 있어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차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삶을 지탱하던 지반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데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찾아줄 수도 없다. 거기다 이미 끝은 예정되어 있다. 끔찍한 고통만이 트랙의 허들처럼 그의 앞에 놓여있다. 허들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면 그다음은? 여전히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끊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나'라는 개념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분열되고 만다.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고스란히 남겨진 내가 짊어지게 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사뭇 평온하겠지만, 그 얼굴에게서 나의 잔잔한 슬픔을 읽을 것이다. 끝내 풀지 못할 후회가 점철된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운 상태로 그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평온해졌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게 될 것이다.


은중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상연과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사진 속 은중과 상연은 단짝친구였던 어린 시절을 재현하듯 활짝 웃고 있다. 은중은, 사진을 올려두기 전까지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것이다. 사진은 묵묵히 감정의 고초를 감당한 후 남겨진 상흔의 증명인 셈이다.


나에게 만약 그때가 오면,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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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