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고독은 한 끗 차이다.
흔히 '외로움'과 '고독'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외롭다고 말할 때는 혼자 있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운 나머지 누구든 절실히 옆에 있기를 바라고 있고, 고독하다고 말할 때는 처음부터 혼자 있는 상태를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다면, 나는 외롭다고 말할 때보다 고독하다고 말하는 때가 훨씬 많았다. 나는 울창한 고독의 숲에 웅크려 나무들을 세세히 살펴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숲에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는 사람을 막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만약 외로움이 불현듯 뾰족한 창을 들고 나를 관통하려 들면, 스스로 숲 밖을 서둘러 뛰쳐나올 것이다.
가끔은 외로움과 고독 사이의 '애매한 상태'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외롭다고도, 고독하다고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단순히 심심하다고 말하기에도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다. 심심하다면 시간을 보낼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이니까. 여유롭게 고독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내 생각을 누군가와 거리낌 없이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한다.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내 생각과 다르거나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윈윈할 수 있지 않은가?
흔히들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들 주장하지만, 이는 타인을 오로지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써서라도 옆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데서 갈등이 빚어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주장은 백 번 옳다. 다만, 상대방도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그에게 슬며시 다가가듯이, 그도 알아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불쑥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외로움을 달래서 다시 돌려보내는 과정은 빠뜨릴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다. 때로는 외로움을 과감히 뿌리치고 고독으로 침잠할 수도 있고, 외로움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달래서 내보낼 수도 있다.
외로움과 고독은 절묘하게 한 끗차이로 나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적절한 비중으로 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100%로 기준을 잡는다면 외로움은 20%, 고독은 80%로 비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외로움이 20%를 넘는 경우가 잘 없는 편이다. 이런 성향인 탓에 모태솔로인 것도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외로움이 나를 격하게 흔들어 고통의 진창에 빠지게 한다는 이유로 연애를 한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고독할 것이다. 그러니,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비중을 명확히 정해두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