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어도 '존재한다.'

by 문하현

이 글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께서는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애디'라는 여성의 죽음으로부터 '상실 이후의 이야기'에 달린 포문을 과감히 열어젖힌다. 애디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술이 페이지 한 두장에 그칠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남겨진 가족 모두를 그녀의 고향인 제퍼슨에서 소설의 종지부를 찍도록 억척스럽게 끌고 간다.


소설은 다중 시점을 통해 죽음 이후에 남겨진 '인물'들을 낱낱이 조명한다. 애디의 남편 앤스와 5남매는 똑같은 상실에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남편 앤스는 부인의 죽음에 무덤덤하면서도 유언을 지키겠답시고, 가족의 여정을 정면에서 막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표방하는 험악한 날씨에 맞서 꼬박 하루면 충분할 제퍼슨에 열흘이나 걸려서 도착한다. 남매들도 상실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감내한다. 애디가 죽기 직전까지도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오로지 어머니의 관을 만드는 일에만 집착하는 자식이 있는 반면에, 방화를 저지르는 기행을 벌일 정도로 상실의 여파를 끝내 감당하지 못하는 자식도 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어도, '나'는 단숨에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은 여진처럼 쉴 새 없이 발을 딛는 땅을 흔들어 남겨진 사람들로 하여금 상실의 울림에 취약하게 만든다. 울림이 수도꼭지가 서서히 잠기듯 조금씩 멎어든다고 해도 죽음을 마음에 아릿한 낙인처럼 되새기는 순간, 끝난 줄 알았던 '나'는 다시금 '곁에 머무른다.'


앤스와 5남매는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 여정 끝에 제퍼슨에서 애디의 썩은 시체를 묻는다. 이들은 시체와 함께하던 여정에서 하지 못했던 일상적인 행동을 다시금 하기 시작한다. 앤스가 그토록 바랐던 의치를 사고 새 부인을 데려오는 등 애디는 묻히자마자 가족들의 삶에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잊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각자가 감내하던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날카로운 칼날 같은 상실의 습격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이들에게 남아있다. 이들을 태운 기차가 끊겼다가 이어진 철도 위에서 겨우내 굴러가기 시작할 때 '애디'는 이들의 옆에서 남은 여정을 함께할 것이다.


내가 죽어 누워 있어도, 엄연히 '나는 존재한다'. 남겨진 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