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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진 May 17. 2018

수업의 추억

1) 2017년 12월의 기록  


5년 전 학부 심리학 수업으로 인연을 맺게 된 청년이 있다.

보고서를 제출할 때 학생들 대부분이 내용을 컴퓨터로 작성하고 프린터로 출력한 A4용지를 제출하는 것에 비해 이 학생은 좀 특이했다. 늘 줄이 그어진 노트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보고서를 내밀었다. 과제를 미리 해오지 않아서 수업시간에 노트에 대강 쓴 건가 싶어서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글동글한 글씨가 매번 노트 앞, 뒷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긴 내용을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면서 녀석이 자기 자신에게, 또 과제를 내 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매번 주의 깊게 읽곤 했다.

그 학생과의 인연은 한 학기 수업이 끝난 후에도 계속됐고, 내가 학교를 떠난 후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녀석은  때때로 연락해 내 안부를 물어주고 자신의 안부를 전해주곤 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내고 훌륭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고마운데, 곧 결혼을 한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청첩장을 내밀었다. 봉투 구석에 낯익은 글씨체가 보였다. 줄이 그어진 노트를 앞뒤로 꽉 채운 동글동글 또박또박한 글씨로 쓴 여섯 글자.  



5년 전 함께한 수업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시간이 떠오르며 마음이 뜨끈해졌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심성이 착하고 성실한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는 만큼 잘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2) 2018년 4월 초

주말에 제자 한 명이 다녀갔다. 함께 수업했을 때는 연세대학교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본인 말로는,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해보면서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길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고, 자신에게 좀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 후 휴학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전공도 바꾸고 학교도 옮겼다.

요즘 어떠냐고 물으니 정말 과감한 결정이었고 과정도 몹시 힘들지만, 잘한 것 같다고 한다. 원래 공부하던 전공도 나쁘지 않았고 그대로도 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자신에게 더 맞는 것 같다고, 좋다고 했다. 말하는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며 나도 참 좋았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옮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이제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졸업 후 진로 문제, 군 입대 문제, 결혼 문제 등 그 또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나누었다. 그런데 헤어질 때쯤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교수님 수업 마지막 시간에 너무 아쉬워서 사진을 몇 장 찍었었어요.”


나는 놀라서 막(?) 뭐라 했다. “아니, 수업 시간에 휴대폰 쓰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겼었단 말이야? 내 허락도 안 받고 내 사진을 찍었다고.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너무하네~!” 그러면서도 궁금한 마음에 나에게도 보내달라고 했다.

그날 밤, 그 학생은 사진 3장을 보내주었다. “사진들이 좀 많이 어둡지만 정말 소중한 사진들입니다!” 라는 문자와 함께.



사진을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5년 전 개강 날, 200명의 학생들이 큰 강의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꽉 채워 앉은 모습을 보며 문 앞에서 멈칫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순간이 있었다. 이전까지 맡은 강의 중 가장 많은 수였다. 각오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마음을 다스리며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을 했다. 이 학생은 그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하나였다.


사진을 보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수업 중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모범생 학생이 수업이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 했을까 싶다. “사진 찍을 때 정말 너무 떨렸었어요!” 라고 말하던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더 큰 마음은 고마움이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 준 것도 고맙고, 인생과 일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고 한 내 조언을 진지하게 들어주어 고맙고, 그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해줘서 고맙다.


살아가며 추억이 쌓이고 사람이 쌓여간다. 그런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과 추억, 사람들 덕분에 인생에서 겪게 되는 어려운 시간도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3) 어제, 5월 16일, 제자를 만났다. 역시 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다. 5년 만의 만남.

수업을 들었을 때 4학년이었던 학생은 졸업 후 로스쿨에 입학하고, 3년 만에 졸업하며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지방에서 공익법무관으로 근무 중.


편안한 옷차림에 가끔은 모자도 푹 눌러쓰고 수업을 듣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5년만큼 어른이 되어 양복을 입고 꽃바구니와 함께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모습이 재밌고, 반가웠다.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재밌었던 에피소드, 손들고 앞에 나와 발표했던 기억(한 사람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맞아요, 그랬었지요!”하며 반가운 웃음. 신기하게도 발표 내용과 내가 학생에게 던진 질문까지도 기억이 났다), 그때 가지고 있었던 고민, 로스쿨에서 공부한 과정, 가슴 아픈 연애사, 현재 공익법무관으로 지내는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한 청년이 멋지게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군인에게 너무나 소중한 월차 시간에, 멀리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인사를 하고 간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자리를 떠나 이동하면서 “오늘 점심도 너무 잘 먹었고 오랜만에 뵙고 이야기 나누니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종종 연락드리고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주는 배려도 뭉클하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들과 함께 했던 수업은 모두 200명이라는 대규모에, 전공도 아닌 교양수업이었다. 지도교수도 아닌 한 학기 교양과목 수업으로 만난 인연이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건 귀한 일이다. 물질적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지난 몇 년간 제자들에게도 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앞으로 5년, 10년 동안 우리에겐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생이 누구에게나 그렇듯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도 있겠지만 그들도, 나도 감내하고 성장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쌓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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