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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진 Jul 10. 2019

첫 종강 모임


지난주에 학생들과 종강모임을 했다.

심리학 수업을 맡고 나서 지금까지, 종강 후에 모임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생들이 적은 버킷리스트 때문이었다.  




이번 학기 심리학 수업 중 내 준 몇 가지 과제 중 하나로 버킷리스트를 적는 것이 있었다. 수업, 아르바이트, 취업준비 등으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앞으로 인생에서 해봤으면 하는 경험, 이루어졌으면 하는 좋은 일, 재미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내 준 과제였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상황만 생각하며 지치지 말고 인생 전체를 생각하며 시야를 넓혀보자는 것이 과제를 내 준 목적이었다.


과제 공지 3주 후, 제출한 과제를 받았다.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까?' 궁금했다. 청춘들답게 재밌고 특이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데 몇몇 학생의 목록 중 겹치는 것이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나(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함께 식사 혹은 술을 해보는 것이었다.


"맥주(소주, 소맥... ) 한 잔"

"밥 한 끼"

"치맥"

"파전과 막걸리"


술 한잔, 치맥, 밥 한 끼 등 앞부분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은 수업과 성적을 떠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두 명이 적은 것을 볼 때까지는 '그렇구나..' 하며 넘겼는데, 인원이 늘어가자 마음에 걸렸다. 보고서를 모두 읽고 난 후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볼까...?"


나와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도 궁금했고,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한 학생들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함께 지운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꺼냈다.  

"버킷 리스트에 이런 내용을 적은 학생들이 있더군요."

반응이 다양했다.

어떤 학생은 놀라고("정말 그런 내용을 썼단 말이야?"), 어떤 학생은 씩 웃었고("나야 나~"), 얼굴이 발그레해진 학생도 있었다("그거 난데.. 나만 쓴 게 아니구나.." ).


그들을 바라보며 제안을 했다.

"우리 자리를 한 번 만들어볼까요?"


희망자를 모두 1:1로 만나는 것은 어려우니 함께 만나는 시간을 만들자고 했고, 마음은 있지만 조심스러워서 버킷리스트에 적지 못한 학생들도 있을 것 같아 오고 싶은 사람은 모두 올 수 있도록 했다. 성적에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기대와 오해를 방지할 수 있도록 만나는 날은 기말시험과 성적 마감이 모두 끝난 후로 잡았다.


장소는 학교 앞 작은 호프. 시간은 6:30.

술은 취하지 않도록 맥주 두 잔까지만.

식사 혹은 안주는 배부를 때까지.
나처럼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환영.


모임을 만드는 취지에 맞춰 각자 나에게 궁금한 점 혹은 또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학우들에게 물어보고 나누고 싶은 점을 하나씩 가지고 오기로 했다.  




전공수업이 아니라 학생들끼리 친근한 사이 아니어서 초반에는 잠시 어색하기지만, 곧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 학생이 질문을 하면 서로 돌아가며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나에게 묻는 질문은 바로 답을 주기도 했다. 학생은 진지하게 물었지만 당황하며 웃게 만든 질문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제 와서 하는 얘기인데.., 첫인상이 어떤지 알고 계신가요?" 같은 질문^^.


즐거운 시간 속에 오고 간 질문과 토론 목록들을 정리해보았다.  




1)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2) 일을 바라보는 관점 세 가지(돈이 가장 큰 목적인 직업, 경쟁에서의 승리가 성취를 지향하는 경력 과정, 의미 있는 일을 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려는 소명의식)가 있다고 배웠다. 요즘 상황에서는 직업을 택할 때 "돈"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직장에 다니면서도 의미 없는 일,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본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4)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신나고 좋지만 혼자 있으면 우울하고 불안하다. 마음이 허하고 슬퍼지기까지 한다. 왜 그럴까? 혼자 있을 때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고 안정되게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5)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이성 친구와 헤어지는 일 등 안 좋은 일을 겪으면 마음이 너무 힘들다. 이럴 때 잘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6) 내가 상대방과 친한지, 그렇지 않은지 몰라서 행동이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누군가와 친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는 무엇이 있을까?


7) 지난 몇 년간 너무 달리기만 한 것 같다. 이번 방학은 좀 쉬어보려고 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것일까?


8) 취미는?


9) 혼자 있거나 운전할 때 어떤 음악을 듣는가?


10) 우리에게 왜 잘해주는가?


11) 우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12) 수업을 하면서, 혹은 수업 내용 중 우리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13)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내 호의가 악용되거나 혹은 무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몹시 상한다. 누군가에게 잘해주거나 그렇지 말아야 할 때를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14)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 혹은 뒤통수를 맞아 본 적이 있는가? 그때 어떻게 이겨냈는가?


15) 사람들에게 다가가 마음도 잘 열고 정도 잘 는 편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크게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후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사람과 다시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또 상처를 받을까봐 무서워 주저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힘들다. 회복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16)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인간관계의 폭이 좁았다. 원하지 않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고도 내 성격이 내향인지, 외향 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 좀 더 잘 지내고 싶은데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할까?


17) 사람을 대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갖는 마음은?


18) 어떤 책을 주로 읽는가?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19) 자신의 첫인상이 어떤지 혹시 아는가? 그 첫인상 때문에(?) 개강 후 3주 동안은 수업 시간마다 긴장을 많이 했다. 알고 있나?


20) 일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있는 상황에서 석사, 박사 공부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들지 않았는가? 시간을 관리하고 확보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21) 아직도 심리학을 공부하고, 강의하고, 상담과 코칭을 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를 하는 동기나 이유가 있다면?   


22) 기말시험 답안지를 받으며 학 생 한 명,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다른 학생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다.


23)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떻게 첫 책을 출간하게 되었는가?


24)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 일반적인 두께의 책 한 권을 읽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25) 학년이 올라가는데 아직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초조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26) 수업시간에 핸드폰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까지도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못 찍었다. 오늘은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사실, 모임을 제안하고 종강 후 학생들과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친구들과의 모임도 주도하기 보다 따라가는 편인데다가, 학생들과 이런 모임을 갖는 것은 처음이기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어야 할까, 어떻게 시간을 이끌어야 할까. 괜히 더 어색해지는 것은 아닐까. 몇 명이나 오려나. 학생들은 버킷리스트에 쓸 내용이 없어서 별 마음 없이 썼는데 내가 진담으로 받아들인 건 아닐까?


방학이 시작되어 여행을 가거나 고향에 내려간 경우가 많았을 텐데도 꽤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두 시간 정도면 일어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네 시간을 조금 넘기는 동안 진지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일과 인생에 대한 청춘들의 깊은 고민과 질문이 나왔고,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


호프집을 나와서도 길에 서서 아쉬운 마음에 또 한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 "시간이 늦었어요. 이제 정말 집에 가야 합니다!"라는 내 걱정에 인사를 몇 번씩 하고, 손을 몇 번씩 흔들며 비로소 헤어졌다. 집으로,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학생들 뒷모습이 뭉클했다.  




모임에서 나눈 질문과 답 중 두 가지를 써본다.


11) 우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힘들거다. 힘든 거 안다. 그래도 중심 잡고 생을 잘 살아나가면 좋겠다. 다시 말해, 잘됐으면 좋겠다."


22) 오늘은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쑥스럽지만.. 찍어볼까요? 괜찮다면 저도 여러분 모습을 따로 담아서 오래도록 기억할게요."


서로 동의하고 찍은 흐뭇한 사진들.

전공도, 고향도, 학년도, 나이도, 꿈도 서로 다른 이들.

자신의 길을 고민하며 열심히 걸어가는 청춘들.


잘됐으면 좋겠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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