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 Sinatra
Chet Baker 못지않게 Frank Sinatra도 또한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 간 뮤지션이다. 그는 미국 대중음악의 표준(standard repertoire)을 완성한 인물, 재즈와 팝을 잇는 다리, 편곡가와 오케스트라를 활용한 보컬 아티스트의 전형 등의 평가는 찬사이기도 하지만 왠지 재즈의 전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에 불과한 느낌도 있다. 일부 재즈 뮤지션들은 그를 “재즈 보컬리스트라기보다는 쇼 비즈니스 스타”라고 치부하기도 했으며, 모던 재즈 시대의 일부 연주자들은 그가 상업성과 대중성에 치중했다고 보기도 했다.
Frank Sinatra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부모님은 뉴저지에서 술집을 운영하였고 금주법이 시행되던 당시 마피아와 결탁해 주류 밀매도 사업도 했었다. 천성적인지, 일찍부터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던 환경 탓인지 Sinatra는 항상 문제아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거친 행동을 일삼았고, 좀도둑질도 여러 차례 했고, 결국 고등학교 생활 1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미스럽게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불법적이지만 Sinatra는 나름 풍족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빙 크로스비를 우상으로 삼아 가수가 되기 결심했고 집을 나와 뉴욕의 클럽을 전전하며 빌리 홀리데이, 베니 굿맨, 토미 도시, 에델 워터스 같은 이들로부터 음악적 자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물론 부모님에게 반강제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과감한 결정과 부단한 노력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1960년대 비틀스의 비틀마니아(Beatlemania) 이전, 1950년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전, Sinatra의 ‘시나트라 마니아’ (Sinatramania)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1942년 뉴욕 파라마운트 극장(Paramount Theater)에서 열린 시나트라의 단독 공연은 미국 대중문화사에서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20대 초반의 시나트라는 빅밴드(토미 도르시 밴드)에서 독립해 솔로 가수로 무대에 섰고, 10대 소녀 팬들이 극장을 가득 메우고, 공연 내내 비명, 울음, 실신이 속출했다. 언론은 이 현상을 두고 “Bobby-Soxers” (짧은 양말을 신는 10대 소녀들)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경찰 기록과 신문 기사에는 실제로 수많은 소녀 팬들이 졸도하여 들것에 실려 나갔다는 보도가 남아 있다. Sinatra의 팬덤 현상은 1940년대 내내 이어졌으며, 미국 사회에서 “아이돌적 스타”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사례로 이때의 광경은 20년 뒤 비틀즈의 “비틀마니아(Beatlemania)” 와 비교될 만큼 충격적이었고, “현대적 의미의 팬덤 집단 히스테리”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변변한 경쟁자 없이 재즈뿐만 아니라 스탠더드 팝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던 그였지만 그는 5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에 록 음악이 침투하여 일대 위기를 맞는다. 로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 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더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는 로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으나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19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파란만장하고 화려한 삶의 화룡점정은 아무래도 연애사가 가장 중심이고 Sinatra라 또한 세기의 사랑꾼(?)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평범했던 첫 번째 결혼에서 세 자녀를 두었고 Ava Gardner(애바 가드너)를 만나면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MGM 스튜디오 파티에서 유부남 Sinatra는 가드너의 미모에 압도되었고, 신인배우 가드너는 Sinatra의 카리스마에 서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최고 유부남 스타 가수와 신인 여배우가 만났으니 이 열정적 불륜은 엄청 큰 스캔들로 번졌고, 예상되는 험난한 과정이었어도 Sinatra는 이혼과 재혼의 과정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란 원래 흥미와 재미 측면에서는 큰 저해 요소로 원래부터 바람을 몰고 다녔던 시나트라는 새로운 결혼 후에도 항상 많은 여성들과 바람에 휩싸여 다녔고 침체기에서 오는 우울과 불안정한 심리, 심한 감정 기복과 자살 시도(약물 복용) 등 점점 바닥을 확인하려 내려가는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된다. 반면 애바 가드너는 최고의 섹시 심벌 중 한 명으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Sinatra에게 맞바람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Sinatra는 끝났다는 세간의 평가 속에 결혼 생활도 시간 문제지 이혼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Ava는 Sinatra와의 결혼을 “광기와 열정의 결합”이라고 했으며 “Frank와의 사랑은 미칠 정도로 강렬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파괴했다”라고 회상했다. Ava는 Sinatra의 바람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집착했고, “Frank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랑이었지만, 가장 큰 고통이기도 했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혼 후에도 “Frank는 내 생애의 사랑이었다(The love of my life).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 없었다.”라고 했으며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덜 흥미로웠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자서전에 남겼다.
Ava와 이혼 후 긴 공백기를 갖고(물론 Something은 Very Much 하게) 9년 만에 그 유명한 Mia Farrow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50세 바람둥이 vs 21세 순수 소녀”, “할리우드의 쇼크 웨딩” 등으로 언론이 내용을 전달하였고 누구나 예상했던 파경은 2년 후에 벌어지게 된다. 참고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만든 위대한 게츠비는 미아 패로우가 이혼 후 만든 작품이다.
All Of Me가 수록된 Frank Sinatra의 Swing Easy! 음반은 1954년에 발매되었다. Ava와 이혼하기 전, 이혼 숙려(?) 기간에 “Songs for Young Lovers” 음반으로 재기의 서막을 알렸고 Swing Easy!로 제2의 전성기를 만들게 된다. 이 시기의 프랭크를 아이돌 스타에서 성인 보컬리스트로 변모해 성공적으로 재도약한 시기의 산물이었으며, 특히 Ava Gardner와의 이별 경험은 단순히 사생활 파탄이 아니라, 그의 발라드 해석에 비극적 깊이를 부여한 원천이었다는 평도 많이 있다. 이 음반들을 포함한 Capitol~Reprise 음반사 시절에 “Sinatra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작품들이 집중되어 발매되었으며 “팝·재즈 보컬의 교과서”로 불릴 만한 작품들을 남겼다는 것이 평단과 대중의 공통된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