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피아노를 구매했다. 추석 연휴가 끝나면 배달이 된다고 한다. 다소 늦지만 어쩔 수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좀 돌아왔다. 도대체가 작곡만 하겠다는 소리인지, 연주를 하고 싶다는 것인지, 니즈에 따라 씬디도 디피도 천지차이다. 몇몇 악기사를 함께 돌고 나서 네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코르그 LP380U를 주문했다. 화이트로다가.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많이 만지게 될 것도 같다. 그렇잖아, 이번에 같이 시작한 퍼즐도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부분은 내가 완성했다. 얏호, 어찌나 뿌듯하던지. 평생을 퍼즐은 근처에도 안 가던 내가 너와 함께 하면서 많이 배운다.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실은 내 감정기복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피아노든 퍼즐이든 빡빡한 스케줄을 짜려고 한다. 그렇다. 나도 너처럼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처음 여성센터에서 진행하는 서비스로 만났던 상담사가 그런 게 우울증이죠라고 언급한 뒤로 긴가민가했는데 이번에 너와 같이 간 병원에서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아무에게나 주는 약이 아니라면 그게 맞나 보다. 애써 부정했지만 복용 전후로 달라진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징후.
매일 아침 운동을 가는데, 유독 거울이 보기가 싫고, 시계를 자주 쳐다봤다. 그리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워 후라락 도망치듯 나오기 일쑤였다. 아침엔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기가 힘들고 몇십 분 길면 한 시간을 누워서 멍 때리기도 길었다.
일상에서 나를 찾는 너, 밤톨이, 동생이 벅차서 가슴이 먹먹하고 갑갑할 때면 에라 모르겠다 나 좀 산책하고 올게 하고는 심호흡을 몇십 번을 하든 통화를 하면서 풀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마저도 할 여력도 상황도 안 되는 상황이 방학부터 이어졌다.
복용 후
취침 30분 전 무슨 약이었더라 뭐든 매우 작은 약 반알을 먹고 자니, 아침에 상쾌해졌다. 꼭 그 시간을 지켜서 나른해질 때 잠에 들라는 당부를 따라서 한 주를 먹었다. 현대판 우황청심환이라고 생각하셔라는 말에 솔깃했다. 본디 꼰대가 되어서, 이 정도 감기 같은 것에 무슨 약을 먹나, 했던 내가 어디 갔나 싶다. 그래 이런 기술이 있는데 멍청한 편견 따윈 버리는 게 상책이다.
이걸 굳이 우울증이라고 부를 필요 있나. 살다 보면 누구나 겪는 감기 같은 거다.라고 치부하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일까? 영어로는 Feeling Down, Depression, Blues, Bad Days 정도가 있다고 chatgpt가 알려줬다. 그래 딱 그 정도야. 근데 조금 더 오래가고 살짝 벅찬 거.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한 느낌이거나, 어쩌다 보니 겪는 나쁜 날들이 이어지는 것. 혹시라도 네가 괜한 죄책감을 느끼지 말길 바라며 이렇게 중언부언 말을 늘어놓는다.
네가 기억했으면 하는 말...
적어도 5년은 이렇게 가야 할 거다. 지금 먹는 약의 양은 많지 않아. 끊을 때도 있겠지. 중요한 건 자기가 감정 조절을 배우는 시기라고 깨닫는 것.
6개월 전 예전 주치의 당부로 예약했던 인근 대학병원 의사의 말을 넌 잘 이해한 듯(!?) 보였다. 그땐. 어쩜 이번 월요일 고대하던 사춘기 너,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만났기 때문에 그 말이 와닿았으리라. 자주는 못 가도, 약빨이 떨어지거나 좋은 말이 듣고 싶을 때를 위해 만날 날을 예약해놓을까 보다.
약을 처방해 준 가까운 의원의 선생님은, 그렇게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너를 보며 어찌할 바 모를 때가 오면 꼭 병원에 가야 하는 때이고 개입을 하여 호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다음에는 꼭 유념하라고 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 나름의 노력을 다해서 터널에서 나오기야 했지만.
당사자가 더 커진 자기 의지로 나와야만 더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다. 내가 먼저 네 시그널을 눈치채기 전에, 네가 아, 나 또 살짝 이 다리를 건너려고 하네? 노래를 틀자. 노래를 불러 보자. 이렇게 말이다.
'아 몰라, 걷다가 쓰러지든 말든.'
조퇴를 해야 하는데 내가 병원에 있어서 바로 데리러 가지 못하여 외할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나서 전화를 통해 들은 네 언짢은 목소리에서 나는 '악 나 너무 힘들어'를 읽었다고 했다.
그럴 때야말로, "아, 나 정말 무지하게 힘들어."라고 너는 표현했어야 한다는 것. 혹은 내가, "어 너 지금 무지하게 힘들어 보이는데, 맞니?"
제대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엄마들이 주로 하듯이 아가들의 표정과 신호에서 읽은 감정을 예측하고 짐작하여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마저도 유아기에 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