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지속적으로 좋아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
나의 첫 단편영화 <모르는 사이>는 2022년에 촬영하고, 이듬해에 <브라이덜 샤워>를 찍었다. 촬영 당시에 연출을 공부하던 친한 동생과 주로 나눈 이야기의 소재는 다름 아닌 탈모였다. 신기하게도 연출 시기만 되면 머리가 한 움큼 씩 빠졌는데, 동생도 나와 같은 증상(?)을 겪는다는 거다. 그만큼 연출은 고되다. 안제이 바이다라는 폴란드의 거장 감독은 촬영장에 가는 도중 차에 내려서 구토를 한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기도 하다. 감히 가늠조차 해볼 수 없는 부담감이다. 단편을 직접 만들어 본 뒤에 비로소 연출이라는 것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또 다시 단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탈모는 예약 되어있고, 내 피땀눈물이 들어간 돈이 빠져나가는 소리도 들리는데.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열정적인 영화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이들보다 엄청난 열정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조심스럽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영화를 좋아하기 위해 나름 꾸준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태교를 영화보는 것으로 했던 엄마 덕분인지 ‘영화’라는 씨앗이 나에게 심어졌고, 지금까지 그 씨앗을 천천히 지켜보며 키워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씨앗이 잘 자라게끔 해준 주변 환경이 있었고, 이 환경 속에서 적응하려는 내가 있었다.
예컨대, 어렸을 적 씨앗에 물을 준 건 엄마였다. 예술을 무척이나 사랑하던 엄마는 내가 음악, 미술, 영화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줬다. 집에는 비디오 테이프가 쌓여 있었고, 엄마가 너무나 좋아하는 <유브 갓 메일>을 매번 집에 틀어 놨다. 그 덕분인지 나는 아직도 습관적으로 이 영화를 찾는다. 자연스레 영화가 습관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막연히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대학교 때는 연극영화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틈 사이에 나를 끼워 넣으니 자연스레 그들의 흐름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함께 하는 동지들을 만났고, 이 동지들은 나의 씨앗에 해를 비춰주고 물을 줬다.
잠시 한 눈을 팔면, 이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 씨앗을 보라고 알려줬다. 함께 재밌는 것을 만들어 보자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찍을 때, 무조건적으로 촬영장에서 내가 작품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영화를 지속적으로 놓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간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동료들의 열정이 빛을 냈고, 그 곁에서 나의 씨앗은 자연스럽게 자라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들을 천천히 찾아갔다. ‘좋아한다’는 것은 휘발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영화를 더 깊이 좋아하기 위해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화적 경험이 나에게 선사하는 선물 같은 순간들을 관찰했다. 더 나아가 영화적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영화 팟캐스트 운영하면서 영화를 통해 건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점점 내 안의 씨앗이 피운 꽃잎의 형태가 명확해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영화는 그런 존재다. 수많은 내면의 풍파 속에서 견뎌내어 서서히 꽃을 피운 고마운 존재.
그래서인지 자꾸만 그 주변을 맴돈다. 내 수많은 한계를 뚫고 만나게 되는 단편 영화는 내가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의 결실이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기 위해 쏟은 나의 시간들을 녹여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서히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다 보면 언젠간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게 될 날이 올 거라는 기대감을 살포시 갖기도 한다. 내가 영화를 통해 만난 무수한 이야기들과 사람들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받은 것처럼, 내가 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