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늘 시작이 어렵다. 단편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 3주간은 맨날 빈 페이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다고 뭐가 나오나 싶긴 하지만, 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매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할 수 있는 이유보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유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 영혼이 나가다가도, 갑자기 이유 모를 자신감이 생긴다. 일분일초마다 달라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게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러시아 인형처럼>의 실사판인가.
시작이 어려운 것은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민해야 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에 이야기 소재를 찾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통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 나에게 집중하는 농도가 평소보다 짙어진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은 곧 내가 속한 세계를 민감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현재 어떤 상태에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내외부적으로 깊게 파고들어야 소재를 건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녹록지 만은 않다. 그래서 소위 ‘삽질’을 많이 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여느 때와 같이 삽질을 했다. 나의 자원에서 소재를 캐내야 하는데, 자꾸 남의 땅에 가서 쓸 줄도 모르는 자원을 캐내려 에너지를 썼다. 결국, 나는 몇 주간 로그라인만 써놓고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진 빠지는 루틴을 지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나의 안부가 궁금했던 감독님은 내가 현재 시나리오 쓰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니 한 줄기 빛과 같은 조언을 해 주셨다.
“단편영화라는 것은 한 편의 잘 쓴 에세이와도 같다. 너는 너 만이 갖고 있는 이야기가 분명 많은데, 왜 자꾸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끌어다가 쓰려고 하니?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 어떤 사건들이 있는지 면밀히 봐. 장편영화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란다. 장편영화를 쓰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 조사를 하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인공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때를 만난단다. 그때 나의 이야기를 쓰는 거야.”
맞다. 내가 지금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즉,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나려면 어떤 주제에 대해 나만의 철학이 확고히 있어야 하고, 살아보지 않은 캐릭터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감독님은 가벼운 책임감으로 작품을 대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가벼운 마음은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니까.
그래서 시나리오가 무섭다. 내 삶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회피형인 나는 지난번 단편영화 <브라이덜 샤워>에서 모든 인물을 회피형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라이덜 샤워>는 파티에서 주인공인 가을이 친구들에게 파혼하고 싶다고 속내를 고백하는데, 이를 예비 신랑이 듣게 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등장인물들이 주인공 커플을 두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을 내버렸다. 사건 앞에서 모두가 자리를 떠나는 맥 빠지는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었다.
물론 무서움을 상쇄할만한 좋은 면도 있다. 일단 이야기의 꼭지를 틀기 시작하면 그 세계로 뛰어들게 된다. 인물과 아주 밀접하게 가까워져 특정 기간 동안 우리들만의 은밀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시간들이 귀한 이유는 어느 순간 내 시선의 한계에 타인을 가두게 되는 때가 많아졌는데, 캐릭터를 창조하다 보면 의식적으로 그런 한계를 깨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을 바라보는 법을 캐릭터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이제 다시 삽질을 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했고, 그 안에서 ‘라희’라는 인물이 탄생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김혜리 평론가가 진행하는 <조용한 생활>에 김현우 PD가 나와서 래러미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했던 부분이 생각났다. 이 작품은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다큐 형식을 가진 희곡이다. 한 사건을 두고 각자 다른 의견을 내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김현우 PD는 어떤 현상 혹은 대상을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뛰어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위 내용이 이번 단편 영화에서 나의 핵심 과제가 될 것 같다. 물론 김현우 PD가 한 이야기는 직접 그 현장에 몸 담아보라는 얘기였지만, 어쨌든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맥락은 비슷한 것 같다. 머리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적당한 거리를 두는 미적지근한 상태일 수도 있고, 혹은 나의 편안함을 택한 길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알고 싶다고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 대상이 많지 않다. 이번만큼은 내가 창조해 낸 인물들과 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고 치열하게 갈구해 봐야겠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내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을 기대한다. 잘 만드는 것보다 진심으로 만드는 나의 모습을 그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