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으로 하는 자기소개
- MBTI가 뭐예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단순한 아이스 브레이킹을 넘어 회사 면접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이 질문. MBTI는 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캐서린과 그녀의 딸 이사벨이 ‘카를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성격 유형 검사다. 그녀들은 각각 INFJ, INFP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기하게도 MBTI에 과몰입하기로 유명한 유형이다.
MBTI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갑작스레 산업 현장에 투입된 여성들이 진로 고민에 빠지자, 이를 돕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이처럼 MBTI는 본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나 지금은 되려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성 출연자가 자신은 F인 반면 상대 남성이 T라 잘 맞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녀를 비난한 사람들조차도 MBTI 검사를 한 번쯤은 해봤을 거다.
캐서린과 이사벨은 알았을까, 본인들이 만든 성격 유형 검사가 80년 뒤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성행할 줄은. 이제 MBTI는 빠질 수 없는 자기소개 필수 요소가 됐다.
“언니 MBTI가 뭐라고 했었지?”
“ISFJ”
“엥 ENFP인 줄”
“뻥이야, ENFP 맞아”
은채는 종종 자신의 MBTI를 거짓으로 꾸며냈다. 주로 그녀는 좋아하거나 닮고 싶은 유명인의 MBTI, 혹은 그럴듯한 MBTI를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성격 유형을 바꿔 소개했다. 이에 나는 ‘은채의 16가지 그림자’라는 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언니는 왜 그렇게 맨날 MBTI를 바꿔?”
“그냥? 재밌잖아. 처음에는 다들 안 믿다가도, 나중에는 내가 뭘 할 때마다 ISFJ라 그런 거래.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짜 ISFJ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왜 배우들이 작품 끝나고 연기 후유증 걸리는지 알 것 같더라니까”
그럴싸한 이유였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나 역시도 MBTI를 속인 적이 있었다. 입사 지원 서류에 MBTI를 묻는 말이 있길래 외향형이라 답했다. (사실 순도 I 70%의 내향형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입장에서는 내향형보다는 외향형을 선호할 것 같아 거짓말했다. 혈액형처럼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매번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니 거짓말을 하는 데 죄책감이 들지도 않았다.
“만약에 너는 MBTI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걸로 바꿀래?”
“나? 나는… 음 ISTP?”
심각할 정도로 걱정이 많고, 주변 사람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참지 못해 한 마디 버럭 질렀다가도 이내 곧 후회해 버리고 마는 사람. 이런 내 모습과 달리 주변 사람에게 큰 관심 없이 무던히 살아가는 ISTP가 항상 부러웠다.
“그럼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처럼 소개해 봐”
“언니처럼?”
“MBTI를 막 바꿔버리는 거지. MBTI가 뭐냐고 물으면 ISTP라고 답해. 그리고 세상만사 관심 없고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아주 시크하게.”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사람들만 속이는 게 아니야. 너 자신도 진짜 속여야 돼. 네가 ISTP인 것처럼 자신을 세뇌시키는 거지.
.
.
.
“언니 킹 받는 게 뭔지 알아?
진짜 어이없는데 좋아. 그거 정말 괜찮은 생각인 듯”
그때부터 우리는 ISTP의 특징을 찾아보며 훈련에 돌입했다.
- 남한테 관심 없고 관심받는 것도 안 좋아함
- ‘그런가 보다’ 마인드로 살아감
- 요점만 듣고 요점만 얘기하고 싶음
- 빈말 못함
(…)
이러쿵저러쿵. ISTP의 특징을 하나씩 읊을수록 우리는 들떠갔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MBTI, 그리고 나는 이 검사의 허점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실전에 뛰어들기로 했다.
마침 나는 일주일 뒤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실전에 적용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곳에서 기한 없이 ISTP로 살아볼 예정이다. 어쩌면 가짜 ISTP로 살다가 진짜 ISTP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님 사람들이 만든 ISTP에 대한 편견에 질려 진짜 MBTI를 공개하게 될 지도. 아 어쩌면, 새롭게 바뀐 추구미에 맞춰 MBTI를 바꿀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은채는 가짜 MBTI를 ISFJ에서 ESTP로 바꿨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새로운 MBTI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이 작지만 귀여운 거짓말로 그동안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원하던 삶을 살아가게 될까?
*본 에세이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