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주류를 선망했다
쿨톤병, 외국병.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노답인 병이 하나 더 있다. 이름하야 홍대병. 말 그대로 보편화된 취향을 싫어하고 비주류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취해있는 병이다. 처음 ‘홍대병’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무슨 그런 병이 다 있냐며 웃었는데 실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유명해지면 마음이 식곤 했다. 그래서 유구한 케이팝 철새의 시절을 거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오랜 기간 동안 정착한 그룹이 있었다. 바로 엑소다.
여느 10대가 다 그러하듯 나도 엑소 빠순이 중 한 명이었다. 엑소가 으르렁으로 인기 몰이를 시작하자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던 난, 스스로를 데뷔 팬이라며 남들과 선을 긋기 시작했다.
“넌 언제부터 엑소 좋아했어? 난 데뷔팬인데”
연습생 시절의 엑소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년천지라는 이름을 마구 내뱉으며 그들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척했다. 엑소 초능력 콘셉트에는 크게 관심도 없었지만 그제야 부랴부랴 외웠다. ‘디오는 힘, 찬열은 불’ 지식인에 누군가 정리해 둔 목록을 읊어가면서 말이다.
*소년천지 : 엑소의 전신, SM 신인 남자 아이돌 그룹 떡밥으로 유명했다.
괜히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다 엑소 좋아하잖아. 너도 그러니?”라고 물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엑소 좋아하는 수많은 애 중 한 명이 된 것 같았다. (실은 그게 맞았다.)
그때의 난 빈지노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우며 은근한 정신 승리를 했던 것 같다.
근데 여기서 포인트.
아쿠아맨 말고
nike shoes, speech 04.relation 등 수록곡만 들었다. 정말 지독한 홍대충이었다.
청소년기 때부터 지독했던 홍대병은 아직까지도 완치될 줄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로 밴드 음악에 푹 빠진 난, 케이팝과 힙합 또는 R&B로 점철된 플레이리스트에 인디 밴드의 노래를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공연에 빠져 버려 더 이상 음원을 못 듣는 지경까지 왔다.
요즘 실리카겔, 터치드 등 실력 있는 밴드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밴드 붐은 온다’라는 슬로건을 외친다. 나 역시도 그에 동조하며 신난 척했다. 사실 마음 한편은 밴드 붐이 안 오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만 알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 정말 홍대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생각해 보니 이놈의 홍대병은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음, 저는 월 플라워랑 라스트 나잇 인 소호랑…”
그리고 어벤저스를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마지막 문장은 자체 묵음 처리했다.
보통 홍대병은 ‘특별해지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 같다.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긴 애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튀어 보이고 싶었다. 나는 다르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타이틀곡보다 수록곡을 찾아 듣고, 남들이 모르는 가수를 발견할 때면 보물 찾기를 해낸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정말 특별하고 멋진 사람을 볼 때면 그간 나의 행적들이 추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은 홍대병이 아니라 진짜 홍대 그 자체인 것 같아서. 척하는 나와는 달라서 괜히 주눅 든다.
흔하지 않고 싶으면서도, 남들이 흔히 유행이라 하는 건 다 따라 해 보고 싶은 아주 모순적인 마음. 두바이 초콜릿 열광을 이래 못한다면서 이웃집 통통이 쿠키는 사 먹는다. 에이블리는 인정 안 하면서 무신사에서는 잘만 사 입는다. 가끔 길 가다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볼 때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다. 헤드폰에 프라이탁에, 무신사룩. 힙을 추구하지만 묘하게 다 똑같아서 평범해 버리는 스타일.
그 옷을 입고 진짜 ‘홍대’에 갈 때면, 가지각색의 개성을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 평범히 묻힌다.
아무래도 나는 백날천날이 있어도, 홍대와 성수에 모여있는 사람들처럼 되진 못할 것 같다. 대신 완전히 도시도 완전히 시골도 아닌 우리 동네 남양주와 꼭 닮았다.
홍대병이란 단어는 특별해지고 싶었던 나의 지질했던 흑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아직도 특별하다는 게 정확히 뭔진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하다는 건 남들이 듣지 않는 노래나 영화를 소비한다거나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는 건 이제 좀 알 것 같다.
남들과 꼭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알아가며, 조금 더 깊은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 그럴 때 우리만의 개성을 갖게 되고, 개성을 가진 이는 조금씩 빛나게 된다. 결국 ‘남’이 아닌 ‘나‘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연습이 시작인 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
공연
밴드 음악
케이팝
나는 솔로
아메카지
유니클로
프라이탁
에세이
심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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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병에서 벗어나려면 아직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토록 원하던 개성을 갖게 될 것 같다.
어쩌면
홍대 대신
남양주 코어가
꽤 괜찮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