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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Dec 29. 2023

좋은 대학 가야 남들한테 무시 안 당하잖아요

민사고 하위권을 거친 재수 시절의 이야기

연말은 잔인하다. 1년을 자랑할만한 성과로 채운 사람에게는 축복이나 무언가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시기다. 내년엔 할 수 있으려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불안함을 자극하기도 한다. 특히 재수를 결심한 수험생에게 12월의 마지막 순간은 유독 춥다. 내가 그랬다. 


나는 2012년 수시 원서 6개에서 모두 불합격하고 2013년 1월에 재수를 시작했다. 재수를 시작할 무렵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다 끊었다. 나를 보면 그들이 비웃을 것 같았다. 민사고까지 나왔으면서 대학엘 떨어지다니. 그때 나는 타인이 나를 비웃거나 치켜 세우거나 그 둘 중 하나를 하는 존재인 줄만 알고 있었다. 하버드에 합격한 사람은 치켜세우고 3년간 학비를 지원받고도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 나같은 인간은 비웃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모멸감을 참을 수 없어 졸업 후 조용히 동문 모임에서 사라졌다. 


그 감정은 내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알던 개인적인 원인과, 입시에서 실패하는 것이 비웃음으로 이어진다고 주입 했던 사회적인 원인이 결합하여 피어올랐다. 그때 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는 줄 아는 오만한 10대였으며, 부모의 행복이 나로 인해 좌우된다고 믿었던 이상한 책임감의 K-장녀였다. 대학 입시 전까지 난 항상 승리자였다. 중학생 시절에는 반에서 곧잘 1등이었다. 대학에 떨어질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다. 부모님은 내가 심통을 부려도 이해해 주셨고, 학원 선생님들은 앞자리에서 반짝거리는 눈을 한 나를 기특해하셨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주어지는 그 달콤한 보상을 이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비극이었다. 나는 홀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나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고 사라져야 마땅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대학에 떨어진 것은 나에게 크나큰 시련이요, 재수를 하는 이 순간이 인생의 바닥이 생각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2023년 연말이 왔다. 나는 재수 시절을 거쳐 직장에 취직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입학 후 청소년 멘토링을 할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명문대 대학원에 입학한 나를 우러러보며 질문했다. 대학 가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영어는 어떻게 공부해야해요? 혹시 중 3때부터 공부해도 인서울 할 수 있나요? 나는 (나름)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비친다는 게 신기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하여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크게 없었다. (물론 내가 인서울을 했기 때문에 지방대 학생이 받는 차별을 겪지 못해서 그런것일 수 있다.) 입시와 관련한 감각을 다시 느끼는게 낯설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너희들은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야? 


좋은 대학 가야 남들에게 무시 안 당하잖아요. 


2023년의 그들은 2013년 내가 마주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학문의 기초이기 때문이 아닌 보상을 받고 싶어서 하는 공부.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닌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해나가는 공부. 1번부터 5번 사이에 숨어 있는 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생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들의 부모는 공부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혹시 가르쳐 줬을까?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라며 맹목적으로 겁을 주지는 않았을까?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친구가 입시에서 실패한 아이들에게 "대학은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아"라고 조언한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진심어린 조언을 건넨 그에게 학생들은 "그렇게 말하는 어른이 제일 싫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너무 하기 싫은데 꾸역꾸역 해나가는 공부의 결실이 크지 않다고 이야기하는게 속이 상했을 지 모른다. 차라리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은 저절로 풀린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더 명쾌했으리라. 많은 이들이 공부를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수단으로 대한다. 욕망의 사다리를 올라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무기. 어쩌면 남들을 무시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을 표출할 도구. 널리 이롭게 하는 공부는 온데간데없이, 한국의 입시 한복판에는 욕망이 또아리를 튼 문제집 더미만이 남아 있다. 


낭떠러지에도 꽃은 핀다 

의대 입시 정원을 두고 언론이 뜨겁다. 상위권 학생의 정원이 늘어나는 현상이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보이고, 한 켠의 누군가에게는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의사를 비롯한 전문직은 더이상 직업이 아닌 하나의 계급이 되었다. 아래는 입시사이트 ‘오르비'에 매년 업데이트되는 직업 서열이다. 의사가 다른 어떤 회사를 다니고 연구를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직업 서열.jpg.

의사라는 직업이 문제 맞추기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트로피가 된 이상, 의대 정원 늘리기는 의사를 늘리는 문제가 아닌 트로피의 수가 몇개가 되는가의 문제로 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부를 수단화하고 직업을 수단화하여 계속해서 남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한 경쟁만을 해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안정적인 것, 남들 보기에 좋은 것, 시험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전문가 자격증. 삶은 어느샌가 하루하루의 연속이 아닌 낭떠러지에서 두둥실 구름 위로 올라서느냐 혹은 떨어져 죽느냐의 문제로 변한다. 떨어진 자에게는 무시가, 올라선 자에게는 무한한 찬양이 있으리. 슬프게도 세상엔 그런 사람이 있다. 남을 자격증으로 판단하고, 구름 위로 올라서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그들 눈에 들고 싶다면 우리가 잔혹한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으로 비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구름위로 올라서지 못한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만 이 글의 끝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세상이 낭떠러지로 떨어진 당신에게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은 내가 재수를 했는지 어느 대학에 갔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20대를 시작하는 자신의 인생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며 심각하기 그지없게 생각했던 내 부모는 재수학원 학원비를 대주고 내 앞길을 신경썼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딸의 교육에 몰두해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터에서 치이고 자라나는 내 동생의 사춘기를 견디느라 심신이 지쳐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못갈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 하는 딸을 위로하면서도 내일 저녁 반찬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부모도 사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40대 중년남녀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나는 상상 속의 사회적 무시와 맞서고 있던 셈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멸시하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를 멸시하는 행동을 그만두니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시 결과보다 입시로 인해 상처받았을 마음을 더 걱정해준 부모, 남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줄세우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길 원하는 친구들. 당신과 나는 어딘가에서 실패할지 모른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직업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뭐?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런 실패에는 관심없다. 우리는 뭐든지 될 순 없을지 모르나, 무엇을 해도 상관은 없다. 삶은 낭떠러지 혹은 구름이라는 극단적 갈림길이 아닌 하루와 또 하루를 견뎌내는 지난한 일상의 연속이다. 당신이 낭떠러지라 생각한 그곳에 사실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재수를 시작하고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느낄 때 나는 자주 해운대 바닷가를 찾았다. 장산역 집으로 들어가기 두 정거장 전에 내리면 바닷가길을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었다. 철썩 철썩 모래를 때리는 파도는 패배자인 나와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부서졌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남들에게 무시를 받을 거라 지레 짐작했던 무시하지 않았다. 그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파도와 공기는 나와 상관없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내가 무언가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참 많다는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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