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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제가 왜 글을 써야 하는데요

글쓰기 과제의 추억

by 헤일리

매주 일요일 자정, 기숙사 거실은 고뇌하는 청춘들로 가득하다. 노트북이 네개, 사람도 네명, 컵라면은 다섯개. 이미 마감은 넘겼지만, 청춘들은 아직 아이디어도 내지 못한 상태다.


"다른 애들은 뭐라고 썼는지 들어가봐"


일찍 과제를 끝낸 401호의 딸기양이 홈트레이닝을 하며 여유롭게 흘린 말에, 청춘들은 자기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구글 드라이브에 접속한다. A반 학생 중 세명, B반 학생 중 아홉명이 이미 글을 제출한 상태이다. 제목은 '내가 선원이었을 적의 날들', '강아지를 길러서는 안 되는 이유', '투표권 연령 하향 조정의 근거' 등 천차만별이다. 헐 얘 이번에 진짜 잘썼다. 저번이랑은 차원이 다른데? 이러면 나는 뭘 쓰란 말이야. 라면 면발이 부는 와중 청춘들은 잠시나마 문학 평론가가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다녔던 시절의 일이다. 지낼 곳 없는 청년 백수에게 기숙사까지 제공해줬던 그 연구소에는 서양 철학이나 동양 정치 사상 등의 수업도 있었지만, 자유 글쓰기 시간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편, A4 용지 한장 분량, 주제는 자유. 대충 아무 말이나 적어서 낼 수도 있었으나, 자발적으로 인문학을 경험하겠다 걸어들어온 청춘에게는 한장의 글도 창작의 고통을 낳는 법이었다. 게다가 각자 자신이 올린 글을 구글 드라이브에 제출하는 형식이다보니 다른 학생들이 어떤 글을 썼는지도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잘 쓴 글 하나가 떡하니 올라와 있는데, 형편없는 글을 제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경쟁을 통한 의욕 고취 작전이었는지, 일일히 이메일을 받기 귀찮았던 교수님의 묘수였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분명한 것 하나는, 일요일 밤 열두시가 되면 청춘들의 고뇌와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했다는 것.


403호 학생이었던 나는 일요일 밤마다 거실에 둘러앉는 지각생 모임에 자주 출몰하고는 했다. 경영학과를 졸업해 생전 글이라곤 보고서 밖에 쓰지 못하던 나에게 '자유주제 글쓰기' 만큼 어려운 것은 없었다.


'차라리 글쓰기의 역사를 분석해오라고 하지.'


언론정보나 건축을 전공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수업에서조차 글쓰기를 해본적이 없다고 했다. 뭘 쓰지. 할 말도 없는데. 컵라면만 후루룩 거리기를 여러번,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처음 쓴 글은 '당신이 주말 밤 대학로에 가야 하는 이유' 였다. 불닭볶음면을 먹던 사과양은 '우리가 빈티지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를, 끝까지 라면은 먹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다 결국 항복한 포도양은 '얼음 위에서의 추억'을 첫 작품으로 정했다. 나름 새벽까지 고민한 결과를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 하면서, 혹시 내가 천년에 한번 날 법한 글쓰기 천재면 어떡하지, 설레발 치는 것은 덤.

그러나 일주일 뒤 내 첫번째 글에는 빨간펜이 벅벅 그어져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익선동이 아니라 왜 대학로에 가야 하죠? 빈티지 옷을 왜 입어야 하는지 이 글이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음 위에서 어떤 순서로 사건이 발생한거죠? 과제를 제출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갔던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지난 학기에는 수업 시간에 운 학생도 있었다더니, 이만하면 으앙 울뻔도 했다. 교수님 제가 경영학과를 졸업해서, 아직 글쓰기를 잘 못하겠더라구요. 아니 그리고 솔직히 우리가 이런 글을 써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입 밖으로 차마 내지 못한 말을 교수님은 이미 파악하고 계신 듯 했지만, 두꺼운 안경 너머의 표정은 냉정하기 그지 없으니.


"다음에는 비평문을 써 오세요."


이번주엔 컵라면을 두개는 먹어야겠다.


몇 잔을 마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일도 8시 출근인데, 집에 돌아오니 열 한시였다. 도어락을 두드리고 외투를 벗어던지는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회식 자리에는 학벌 얘기, 회사에 누가 승진을 했다는 얘기, 누구는 주식으로 벼락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그냥 미친척하고 집에 간다고 할 걸.


그럼에도 모처럼 다같이 모인 자리라며 기뻐하는 부장님의 얼굴을 두고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주는 대로 술을 계속 들이켰다. 나름 뺀다고 했지만 취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하고 싶은 얘기도 못하고 듣기만 했단 말이야. 불편한 스타킹과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니 조금 살 것 같았지만, 억울함과 짜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잠에 들면 다음날엔 또다시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가는 일상이 반복될 게 분명했다.


그 순간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자연스러웠다. 노트북을 켜고 메모장을 눌러 나의 오늘 기분을 적어내려가는 순간은, 오늘 하루가 무의미하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당연한 일 같았다. 쓰는 내용은 물론 전혀 다른 것이었다. 최근에 읽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기술에 대한 서평. 일과는 아무 관련 없는 글을 타닥거리고 난 후에야 소주로 흐릿해졌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쓰라고 해도 도무지 써지지 않는 글이었는데, 신기했다. 글쓰기가 이렇게 머리속을 맑게 해주고 술을 깰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 평소 잠에 잘 들지 못하는 나는 그날따라 깊이 잘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의 글을 들춰본다. 목적이 없이 글을 쓰는 연습을 했던 게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돌아보면서. 수준은 형편없지만, 읽을 수록 과거의 나를 새롭게 알아가는 느낌이 들어 몇 번이고 읽게 되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 편을 쓰라고 했던 교수님은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알았을까.


글쓰기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일상의 찌든 때를 글으로 조금이나마 닦아냈던 경험. 밤이 늦어서 내일이 온다는 게 아까울 때 새벽에 무엇이라고 남기려 애썼던 경험. 글쓰기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자기 주장이면서 자기 치유인 유일한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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