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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연대하고 공감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기 때문에

by 헤일리

“시를 한편씩 외워 오세요.”


방금 까지 고요했던 강의실 안 공기가 훅 더워졌다. 당근 펜을 흔들며 잠에 막 들려던 뒷자리 학생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다음 주에 떠나는 문화기행에서 시낭송대회를 열 예정입니다. 인상 깊은 시를 선정한 학생에게는 상품이 있겠습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개량 한복 자락을 펄럭이며 천천히 강의실 밖을 나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학생들은 서로 놀란 눈빛만 주고받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영학, 언론정보학, 건축학을 전공한 학생은 있었지만 문학을 전공한 이는 한명도 없었다.


"아 가뜩이나 할 것도 많은데 무슨 시야”


평소에도 불만이 많기로 유명한 A군이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 강의실 안은 볼멘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불만 에너지를 충전한 학생들은 뿔이 달린 황소들 같았다. 우리가 교수님 강의만 듣는 것도 아니고 다른 레포트 쓸 것도 얼마나 많은데요. 오글거리게 무슨 시 낭송이에요. 그러나 교수님은 화이트보드에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외워 올 시와 그에 대한 해석을 제출하라는 공지사항만을 남기고 떠날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인문학 수업을 들으러 다닐 때의 일이다. 수업을 주관한 연구소에는 다양한 강의가 있었다. 그 중 동양철학 수업은 유독 특별했다. 동양철학 교수님은 매년 가을이 되면 학생들을 데리고 '문화 기행'을 떠나신다고 하셨다. 2박 3일간 안동의 도산서원과 농암 종택을 방문하여 학생들과 교류하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모처럼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교수님이 어떤 걸 기획하고 계시는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 혼란의 중심은 단연 시낭송대회였다.


대회의 순간이 다가오자 어색함은 배가 되었다. 정적이 흐르고 준비된 초코파이가 동이 날 때쯤 교수님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한 명씩 나와서 자신이 고른 시를 읽고 다음 사람을 지목하면 됩니다. 오늘의 분위기를 주도한 학생에게는 시집을 한권 선물해 주도록 할게요. 모두가 교수님의 눈을 피하는 사이, 평소 조용하기로 유명한 B군이 첫타자로 나섰다. 공대생답게 체크남방에 비니를 쓴 그는 수줍게 자신이 고른 시를 소개했다.


“저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라는 시집에서 좋아하는 시 하나를 골랐습니다. 제가 워낙 시집을 읽는 걸 좋아해서… 제목은 <슬픔의 자전> 입니다”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

타워펠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펠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B군의 낮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에 맞춰 한옥 바닥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듯 했다. 시낭송대회를 귀찮아 했던 C양은 넋이 나간 채로 B군을 지켜보았다. 낭송이 끝나니 진심 어린 박수가 쏟아졌다. 교과서에 밑줄을 긋고 뜻을 해석하기 바빴던 학생들은 이제야 이 대회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있던 A군도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아 A4용지를 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차례차례 준비해 온 시를 읽었다. 누군가는 <질투는 나의 힘>을 읽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지난 날을 고백했다.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가 쓴 시를 골라왔다며, 잠시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침묵을 제안했다. 교수님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꼭 황소가 될 필요는 없다고 돌려 말하는 듯했다. 이제까지 짜증과 억울함만 표현하기 바빴던 우리는 시를 읽는 순간 마음 속 연약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학생들은 초코파이 속 마시멜로우처럼 말랑해졌다.


연대와 화합보다 혐오와 분노가 더 쉬운 사회다. 댓글창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의 면전에 대고도 폭력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살아가며 느끼는 패배감과 슬픔을 달리 표현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법칙을 완수하는 사람은 드물고, 우리는 생의 특정 단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가장 손쉬운 것은 남을 비난하거나 우습게 보는 일이다. 어차피 자신의 삶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은 타인의 삶에 무심해지기도 쉽다.


인문학에게는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해내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게 하는 힘이 있다. 나에겐 문화 기행에서 열린 시낭송대회가 그 가치를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깜깜했던 마음을 기형도의 <대학 시절>을 읽으며 해소했고,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가 쓴 시를 통해 슬픈 감정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백수의 마음 깊은 곳 패배감을 인정하고 나니 나에게 짜증과 혐오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시를 낭송한다면 우리가 서로 악담을 해대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인문학을 어디에다 ‘써먹냐’며, 마치 학문을 먹을 것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다. 더 많은 음식과 부동산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인문학은 더 많은 사람의 사연을, 더 많은 감정의 표현법을 가르친다. 타인을 향한 무관심으로 쉽게 욕망에 저버리기 쉬운 세상 안에서 서로를 향한 마시멜로우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나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담담하게 말하게 되는 것. 우리가 다시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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