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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Apr 01. 2021

1. 도태

어쩌다 뒤쳐진 사람들

그녀는 항상  한잔 마시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7 50분에 간신히 도착해 출근 카드를 찍은 시간은 7 55분이었다. 마른 목을 축일 커피가 필요했다. 아침부터 임원진 보고로 바쁜 팀장의 옆구리를 치며 슬쩍 사내 카페로 이동했다. 월요일 오전의 회사는 우울한 직원 반과 과장되게 활기찬 직원 반으로 나뉘어 기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커피숍엔 직원들의 향수 냄새와 바삐 머신을 돌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구직 어플리케이션 '원티드'를 괜히 뒤적거린다. 사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이직을 알아볼 만큼 의욕적이지도, 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그만둘 만큼 용기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구직 사이트를 괜히 살펴보는건 습관에 가까웠다. 원티드는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한 이야기를 기꺼이 업로드하는, 일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었다. 일에 진심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열심히 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언젠가가 실현될때까지 회사가 그녀를 기다려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변화하는 시대에서 데이터분석 능력은 필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벌써 저희 스타트업의 기획자 중 80%가 데이터 분석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죠.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하는 지금,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직장인으로서의 한방이 필요합니다."

 

진동벨이 울렸다. 카페라떼 한잔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의 명랑한 목소리가 카페 안을 울리지만 귀는 오로지 핸드폰 속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한방이라니. 그런 것 없는데. 역시 데이터 분석을 배워야 하나. 오늘도 원티드는 한 나약한 직장인의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원티드의 결정적인 한방은 도태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도태, 淘汰

1. 물에 일어서 불필요한 것을 가려 버리는 것. 태사(汰沙).

2. 여럿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을 줄여 없애는 것. 또는, 줄어 없어지는 것.

⊙ 淘(도) - 물에 흔들어서 쓸 것을 기려내는 ‘일다’에서 ‘쌀 일다’ 파생.

⊙ 汰(태) - 물에 일어 나눈다는 ‘일다’에서 흐리게 되어 ‘사치하다’ 파생.


도태는 한자어다. 일 도자와 일 태자를 쓴다. 여기서의 '일다'는 물에 쌀을 씻어 쓸 것을 가려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래 쌀을 씻는 행위에서 잔여물이 빠져나가는 현상에 빗대어 어떤 물질이나 개체가 자연스레 줄여 없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  


줄여 없어지는 것이 쌀의 잔여물이 아닌 생물이 되면 우리가 흔히 쓰는 도태라는 말의 뜻에 조금 더 근접해진다. 자가 복제의 본능을 타고난 이기적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의 결합(번식)을 통해 그 본능을 실현하려 한다.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자연환경, 개체의 건강 등) 번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유전자는 자연히 줄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연도태이다.


도태라는 말이 인간 사회로 오면 단순한 번식 실패를 넘어선 쓸모 없어짐이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자연이 아닌 사회로부터 쓸모 없는 존재가 된 사람들에게 우리는 도태라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영화 포스터가 컴퓨터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손으로 영화 간판을 그리던 영화 간판 제작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잃었다. 상업 매장에 키오스크가 도입되면서 직원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였다. 이 모든 사회 변화를 관측한 현대인은 산업의 트렌드를 파악하지 못하면 나도 언젠가는 도태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명령문을 대뇌에 깊이 새겼다. 이제 노동자는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본인의 자리가 사라질 때를 대비해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업그레이드 시켜 놓아야 한다.


여기까지 이 단어의 쓰임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도태된 인간들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쌀을 씻은 물은 하수구로 버려진다. 번식에 실패한 동물들은 홀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산업에서 도태된 인간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쩌면 런던이나 뉴욕의 거리 한복판에는 도태된 인간을 갈아 넣는 하수구가 있을지 모른다. 지구상 어딘가에 도태된 사람들이 야생 동물처럼 휘적거릴 수 있는 황야가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는 이상 도태된 자들은 사회에 그대로 남는다. 간판을 그리지 않게 된 영화 제작자들 중 다수는 다른 일을 찾아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키오스크로 해고된 단순 노동자들은 어딘가에서 다른 단순 노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엄연히 말하자면 이들은 도태되었지만 완전히 도태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쓸모 없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으려 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 능력을 갖추지 못한, 번식에 성공하지 못한, 컴퓨터로 간판을 만들지 못한, 키오스크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도태되었을까? 이들의 도태는 자기계발의 명령을 어긴 죗값이었을까, 혹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잘못 걸린 결과였을까? 도태된 사람들은 어떤 영혼과 얼굴으로, 사회의 쓰임과 다른 어떤 쓰임으로 자신을 증명할까?

 

그녀는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자리에 서둘러 앉지 않으면 팀장이 돌아올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리에 앉아 검색창에 '데이터 분석 자격증'을 치니 일주일만에 데이터 분석을 격파할 수 있다는 다소 과격한 인터넷 강의 목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면 도태를 면할 수 있겠군. 도태까지의 그날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안도감을 불러오는 듯 했다. 조금 식은 라떼도 그럭저럭 맛이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그녀도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회사와 그녀 자신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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