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울산에서 난 줄곧 서울을 꿈꾸며 살았다. 어릴 적 TV는 서울만을 비췄다. 동경하는 가수들은 상암동 MBC에서 음악중심 무대를 섰다. 인기 뮤지컬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잠실 '샤롯데 씨어터'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즐겨보던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는 종로와 홍대 거리의 시민들을 인터뷰하며 이들이 '일반 시민'이라고 했다. 그 모든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으나, 다 서울에 몰려 있단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저 거리를 걷는 멋진 일반 시민이 되리라 다짐했다.
서울을 꿈꿨던 건 단순히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네의 멋진 언니, 오빠들이 예외없이 서울로 갔기 때문이었다. 분명 상위 3개 대학에 가는 학생은 수험생의 소수일텐데, 주변에는 그 세개 대학에 간 사람들 소식만 들려왔다. 연말이 되면 고등학교와 학원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에 몇 명의 학생이 진학했는지가 써 있는 플랜카드가 붙었다. 기업이 연말마다 사업보고서를 감사기관에 제출하듯이, 교육기관들도 연말마다 자신들의 교육의 아웃풋을 증명한다. 지방 고등학교가 얼마나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는지는, 얼마나 많은 학생을 서울로 보냈는지 여하로 결정된다. 그렇게 대다수의 지방 청년은 자기 고향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작은 성공이라 여기며 서울에 입성한다.
내 서울 첫번째 거주지는 대학 기숙사였다. 보증금은 없었고, 기숙사비는 월 35만원. 2인이 하나의 방을 같이 쓰는 구조였다. 원룸에 공동 취사 시설을 사용했고, 전열기구는 반입 금지였다. 룸메이트와 나는 고데기를 방 안에 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하다가, 건물 관리인이 방문할 때를 대비해 옷장 안에 숨겨두기로 결정했다. 취사 시설이 없어 아침은 편의점 도시락과 토스트로, 점심은 학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은 선배들이 사주는 공짜 술으로 떼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부터 삼시 세끼를 홀로 해결해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나의 밥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젊은 패기에 굶다 폭식하다를 반복했다.
대학 2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기숙사를 나오기로 결정했다. 돌이켜보면 공간에 대한 자율권을 얻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끔찍한 연두색 기숙사 벽을 내맘대로 바꿀 수 있는 곳을 원했다. 내가 밥을 만들어 먹고, 원하는 시간에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은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이었다. 나는 지방에 있을 때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을 모조리 빼앗기면서, 처음으로 주거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 냉장고를 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취사시설이 있었으면 했고, 화장실은 깨끗했으면 좋겠다. 벽은 연두색이 아닌 하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룸메이트가 없었으면 좋겠다. 샤워 후 맨몸으로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침대나 책상이 아닌 다른 '앉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소파 같은 것을 원했다.
서울에서 약 7년을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돈이 없었다. 분명 울산에선 나름 잘나가는 이부장 딸이었는데, 여기서는 갑자기 빈곤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서울 물가는 비쌌고,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쉽게 구한다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과정도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서울 지명을 잘 몰랐다. 강남이 정말 강의 남쪽을 뜻하는 말이 아닌 '강남'이라는 지명을 뜻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홍대가 홍익대학교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도 몰랐다. 오래 빨지 않은 패딩에서 김치찌개 냄새가 난다는 아르바이트 하던 카페의 사장님 말에, 세탁소에 들러 겨울 외투를 맡기기 시작했다. 이주민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생활력을 기르게 된다. 좁은 집에 그릇과 주방도구와 겨울 여름 옷을 어떻게 놔둬야 할지, 좋은 집은 어떤 집을 뜻하는 것인지, 부모와 같이 살면 알기가 힘들다.
내가 거쳐간 방은 총 여섯개였다. 일년 주기로 이사를 했다. 이사 주기는 많은 것이기도, 적은 것이기도 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대학 동기도 있었다. 그는 일년 단위로 이사해야 하는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방에서 대학 진학 혹은 취업 준비를 위해 상경한 청년은 하나같이 나처럼 집을 옮기고 다녔다. 우리에겐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4학년 무렵이 되자 서로의 자취방에서 이케아 티테이블 위에 케이크와 치킨을 올려놓고 먹으며, 여기 월세 계약이 끝나면,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했다. 본래 집이 있는 사람은 소속이 없어도 있을 곳이 있다지만, 집이 없는 사람은 이곳에 있을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 놔야 했다.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한 집에 있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에는 차이가 있을까? 나는 있다고 믿는다. 매년 짐을 싸고, 자기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재던 사람의 마음에는 크고 작은 기스들이 나 있다. 부동산에 홀로 들어가 자기 예산을 밝히며, 제가 살 수 있는 집이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는 그 순간에, 집주인에게 이런 걸 수리해달라고 말해도 괜찮을지 걱정하는 밤과, 자신이 원하는 조건 중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그 마음에 쌓이는 건 기스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건 슬픈 걸까, 외로운 걸까, 내가 성장하리라는 좋은 신호일까? 나에게 꼭 이 모든 과정이 필요했을까?
우린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우린 다시 서울로 흘러들어오기를 선택했을 거라는 걸. 빛나는 전광판과 사람이 그득한 그 거리의 유혹을 결코 뿌리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집을 이고 살아가는 달팽이처럼, 우린 아직 여기에서 이방인인 채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 먼 훗날에, 우리는 바다 끝으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