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 여자의 청약홈 방문기
약 10년간 기숙사/원룸 살이를 하다 보면 이 생활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수납과 짐 싸기의 달인이 되었고, 일년 마다 거처를 옮기는 게 당연히 여겨졌다. 머리가 굵어지고 이대로 한 직장에 쭉 다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원룸이 아닌 제대로 된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이버 부동산, 호갱노노를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어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청약홈이다.
처음엔 청약이 뭔지도 몰랐다. 기사에서 간혹 누군가가 "로또 청약에 당첨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참 운 좋은 사람이라고 얼핏 생각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집을 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나니, 청약을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센 마음을 먹고 청약 홈에 들어가 이번달 청약 일정을 확인했다. 현재 살고 있는 송도 뿐 아니라 서울, 부산 등 다양한 지역에 공급될 예정인 아파트가 많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모집 공고를 클릭해봤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새로 지어질 아파트가 얼마나 실용적일지, 얼마나 알찬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며 꿈에 부풀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청약 통장에 죽 월 5만원씩을 모아왔으니, 납입 횟수로 치자면 괜찮은 점수를 획득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청약홈에는 '내 청약 점수 계산하기'가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국가에서 준 내 점수는 100점 만점에 13점, 청약 통장 가입 기간으로만 얻은 점수다.
가점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주택 기간이 길거나 부양가족이 많아야 했는데, 나는 무주택 기간이 아예 없었다. 한국은 무주택 기간을 30세가 되기 전까지는 0년이라 가정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서른이 넘기 전 원룸을 전전한다고 해도 나는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무주택자가 아닌 것이다. 흥미롭게도 혼인을 한 경우에는 서른이 넘지 않아도 무주택 기간을 인정받을 수 있다. 법적으로 혼인 가능한 연령은 만 18세이므로, 내가 만 18세에 누군가와 혼인을 했더라면 현재 결혼한지 9년차에 20점 가점을 받았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28세에 청약에 당첨되는걸 지상 목표로 삼고 살았더라면 신혼부부 특별공급도 노려봤을 것이다. (물론 자녀가 없는 이상 당첨될 확률은 매우 낮았을 테지만) 30세가 될때까지 결혼하지 않는 건 청약 가점을 생각했을 때 어리석은 행태다. 그때 장난으로 결혼하자던 그 선배랑 확 결혼을 했었어야돼.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아니야, 정신차려.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아이를 갖는 것보다 혼인 기간이 긴 것이 청약 가점을 올리는 데는 더욱 유리하다는 거였다. 청약 계산기에 따르면 부양 가족 한명 있는 것보다(인당 5점) 혼인한지 3년이 지나도록 기다리는 것이(1년당 2점) 가점을 올리는 데 더 유리하다. 그러니 똑같은 28세 여성이라도 결혼 10년차가 미혼모보다 청약에 당첨될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결혼 계획이 없는 사람은 추첨제로 청약 로또 당첨을 노리거나 청약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을 했더라면 특별공급이든 일반공급이든 노려볼 여지가 많았겠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할 계획이 없는 사람은 청약홈 대다수 분양 공고에서 자격 미달이었다. 자녀의 유뮤보다 혼인의 유무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결국 국가가 생각하는 '주택이 필요한 사람'은 자녀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혼인을 했는데도 집이 없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청약홈을 확인하면 할수록 내가 청약에 당첨되는건 마치 하버드에 붙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즐겁게 부르던 동요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역시 시작부터 새집을 사는건 무리였던 걸까. 그렇게 한때 네이버 부동산보다 방문 빈도수가 높았던 청약홈은, 내 메인 화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슈뢰딩거도 아니고, 청약은 있었지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