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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Nov 08. 2021

난 더 나아져야만 해  

끝없는 성장의 덫에 갇힌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장 담론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고 하나, 요즘의 성장 욕구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듯 하다. 하나는 일터에서 끝없이 성장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터 밖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담론이다. 전자는 기업 총수의 자서전에서 볼 것 같은 끝없는 배움의 자세를 강조한다. 주로 IT/콘텐츠 업계 등 변화가 빠른 산업군 종사자들에게 요구되는데, 요는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당신 역시 그에 맞춰 계속해서 업무 방면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인생법칙'류의 책이 제시하는 일찍 일어나라,는 식의 공허한 자기계발 방법보다는 구체적이다. 퇴근 후에도 하고 있는 일을 활용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tool을 배워야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일터 밖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두번째 담론이다. 주요 메시지는 바로 "회사는 당신을 책임지지 않으니, 회사 밖에서 돈 벌 방법을 빨리 찾아라" 정도가 될 것 같다. 요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가 되라는 것이다. 20년-21년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큰 폭으로 움직이면서 덕을 봤던 사람들 위주로 형성되는 담론이다. 이들은 회사에서는 적당히 일하고 돈만 받아간 후, 그 돈으로 어떻게 하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라고 충고한다. 업무 환경에 불만족하는 수많은 한국 직장인들의 호응을 얻으며 계속 성장하고 있다.


첫번째 담론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은 계속해서 전문가로서 자신을 혁신하는 '일잘러'이다. 예시로 드는 A팀장과 B사원은 일터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더 나은 조직으로 이동하고는 한다. 결국 일터에서의 자기계발은 사회로부터의 인정으로 돌아온다. 두번째 담론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은 돈이 돈을 불러오는 규모의 부를 축적한 '자산가'이다. 끝판왕은 한강뷰 아파트, 멋진 차와 멋진 옷 정도일 것이다. 여기에서도 일터 밖에서의 자산 축적이 사회로부터의 인정 (부자로서 받는 동경의 눈빛)으로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자기계발 담론은 성공은 (다시 말하면 이상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경험은) 약간의 운과 노력, 실행이 결합된다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패는, 다시 말하면 가만히 앉아 내 말을 듣지 않는 당신의 탓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사는 그대로 산다는 것은 인생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와 싸워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이런 자기계발 담론은 사실 재무회계의 기본 가정인 '계속기업의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기업의 가정은 기업이 경영활동을 계속 할 것이라 전제한다. 이 전제를 기반으로 자산을 공정가치로 인식하여 회계 장부에 기록하고, 미래의 현금흐름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여 기업의 가치를 매길 수 있다. 계속기업의 가정에서 기업의 생존은 무한하다. 예를 들어 배당금의 규모로 기업의 가치를 산정하는 배당금할인모형은 배당금이 영원히 지급될 것이라 가정한다. 마치 인간이 끊임없이/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불어넣는 수많은 책/강연들과 같이.


성장 담론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기업화하여, 인간의 삶과 성장이 무한하다고 착각하게 한다. 우리가 Return on Equity가 영원할 것이라 가정하고 기업의 가치를 산정하는 것처럼, 인간의 Return on Life도 일정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영원히 생존한 기업이 없었던 것처럼, 인간의 삶도 영원하지 않다. 오히려 육체는 일정 기간 성장한 후에는 계속해서 쇠락한다. 우리의 삶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본질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 종착역은 오히려 성장에 따른 완전한 인정이 아닌 쇠락에 따른 완전한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만약 어떤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면, 이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영원히 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교체된 인간은 어디에선가 각자의 방식대로 쇠락해간다.  


애널리스트의 눈으로 기업을 평가하듯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것인가. 적정 가치를 산정하여 이에 도달할 때까지 자기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인가. 부의 시장에 본인의 인생을 상장하여 시장의 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그렇게 기업이 부도를 예측하지 않듯이 우리는 죽음을 예측하지 않고 어리석게 생을 대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의 여리고 불완전한 마음을 남들이 주는 얄팍한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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