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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Oct 03. 2022

1. 그녀의 책장 조립

위스키와 아이스크림으로 왁자지껄하던 원룸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네 친구들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K는 엑설런트 프렌치 바닐라 맛 하나를 꺼내고는 H의 친구들을 칭찬하는 말을 이어갔다.


H와 K는 부산의 한 재수학원에서 만났다. 인생의 첫 실패를 맛봐 일상의 행복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던 그들은 함께 재수학원의 맛없는 점심을 먹고 하원길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스무살에 만난 인연은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여 일자리를 찾기까지 계속되었다. K는 졸업 후 북경으로 떠났고, H는 그대로 한국에 남아 취업을 했다.


어느날 H는 K로부터 서울 자취방에 들러도 되겠냐는 문자를 받았다. 다음 학기부터 미국에 있는 대학원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비자 심사 받으러 하루 서울에 갈 일이 있는데, 혹시 네 자취방에서 자도 될까? K가 오기로 한 날은 마침 서울 입성을 축하하며 H의 친구들이 들르기로 한 날이었다. 그렇게 H와 K, 그리고 새 집 이사를 축하하기 위해 들른 친구 셋은 월요일 저녁 7시에 문어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올라온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어색한 통성명을 뒤로 하고 위스키 몇잔이 들어가니 서로 그렇게 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H와 K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그런데 저기 쌓여있는 판자들은 뭐야?


K가 가르킨 것은 H가 이사를 오며 쌓여있는 책을 처리하겠다고 야심차게 X팡에서 주문한 5만원짜리 책장이었다. 천성이 게으른 H는 책장을 주문하는 데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조립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그냥 요즘 조금 바빠서 주문만 해두고 조립은 하지 못하고 있었어. H는 얼버무리면서도 내심 집안일을 방치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부끄러워했다.


아니야. K는 서랍을 뒤지더니 드라이버와 나사를 찾아냈다.


이거 지금부터 조립하자.


그렇게 술 취한 여자 두명은 달밤에 책장 조립을 시작하였다. H는 나무 판자를 드는 역할, K는 나사를 드라이버로 힘껏 돌리는 역할을 맡았다. K는 152cm의 자그마한 체구였음에도 항상 힘이 좋았다. 드라이버를 돌리는 그녀의 이마가 반짝거렸다.


대충 그정도 돌리면 되지 않아?


H는 술기운이 올라와 슬슬 조립이 지루해지고 있었다. 내일 출근이 슬슬 걱정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K는 아랑곳하지 않고 7번 판자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이거 그냥 헐겁게 맞춰놓으면 나중에 큰일나. 나도 어디 유튜브에서 봤어.


결국 K 책장을  정도 맞춰 놓고서야 잠에 드는 것을 허락했다. H 다음날 아침 K 집에 두고 회사로 나갔다. 그리고 K 일어나서 책장을 얼마간 다시 조립하고 집을 나섰다. 이미  조여놓은 나사를 다시  조이며 K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문해둔 책장을 조립하지도 않고 방치해둔 친구를 한심하다 생각했을까? 아니면 책장을 조립할 힘도 없이 침대에 드러누운 친구를 안쓰럽다고 생각했을까?


H는 그 후 며칠간 책장을 다시 방치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과 집에 돌아온 후, 완성되지 못했던 책장을 애써 못본 척 했다. 참다참다 책장을 다시 조립 해야겠다 생각이 든 건 야근을 하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일을 모두 던져 놓고 집에 온 날이었다. 당장 10시간 후에 다시 회사로 가야한다는 점이 견딜 수 없이 짜증나던 날 밤, 문득 책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H는 정갈하게 판자 사이사이에 앉아 번호를 확인했다. 유튜브로 영화 <헤어질 결심> 코멘터리를 틀어놓고는 드라이버를 꺼냈다. 싸구려 나사가 돌아가면서 철가루를 우드득 뿜어냈다. 나사를 돌릴 힘이 부족해 손바닥이 자꾸만 까졌다. H는 K를,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생해서 구한 이 집을, 그리고 그 집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마포구 뒷골목에 위치한 H의 집 앞 골목에서는 쓰레기 냄새가 났다. 화장실 문은 썩어있었고, 부엌은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H는 며칠간 책장을 조립하지 못한 자신의 게으름과 잘못된 집을 구한 본인의 안목을 후회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대단한 기회나 실패, 아니면 훌륭한 누군가의 말 한마디일까? H에게 성장의 기반이 된 것은 독립, 그리고 집을 삶으로 채워나가는 일이었다. 넓은 세상을 꿈꿨던 H는 20대 후반에 돌고 돌아 결국 작은 원룸으로 삶을 수렴해 나갔다. 그것은 H의 삶이 더 좁아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태껏 부모 혹은 학교의 도움으로 살아가던 H가 이제야 자신의 진짜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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