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독일 겨울을 나는 법: 괴테 하우스 방문기

대문호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었다

by 헤일리

역시나 이번 주말 날씨도 호의적이지 않다.

주중엔 그렇게 폭설이 내리더니, 주말에는 주구장창 비만 내리는 중...

한국에 있을 때 워낙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어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매일 을씨년스럽다보니 날씨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방어기제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볕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날이면 그토록 행복할 수가 없다. 두달 새 벌써 반 독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독일의 혹독한 날씨는 독일 특유의 철학적, 내면적 기질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많다. 단순이 우연이라기보다 '환경이 인간의 사유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와서 살아보니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국에서 좀처럼 쓰지 못했던 글이 여기와서 술술 써지는 것을 보면. (밤이 기니까 내면으로 계속 침잠하게 되는...)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그 외에도 파편화된 영방 국가 시스템의 경쟁(=영주들의 자존심 대결), 종교 개혁 이후의 높은 교육 수준, 내면의 자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독일을 시인과 사상가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 영향권에 있는만큼 여기 있는 동안은 날씨 탓에 반강제로라도 이 곳의 문화적, 예술적 인프라를 향유해보기로 한다. (실제로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박물관과 미술관 보유 수가 많은 국가가 독일이라고!)

사흘 전 떠난 남편이 선물로 주고간 뮤지엄 패스(프랑크푸르트와 인근의 39개의 박물관 및 미술관을 이용 가능한 1년권)를 꺼내 들고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나섰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괴테 하우스.

1749년 괴테가 태어나 26세 바이마르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거의 280년 가까이 된 집인데, 가족의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잘 보존되어 있다. 괴테가 상류층 도련님으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집안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큰 서가며, 음악실이며, 괴테 아버지가 수집한 회화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 등..)


괴테 집에 놀러가볼까


남의 집 엿보며 재미있었던 포인트 몇 가지만 남겨보자면,


1) 그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장농

복도에 거대한 장농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재밌게도 1년에 3번 밖에 빨래를 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대세탁' 문화로 인해 수많은 옷과 린넨을 보관할 수 있는 장농이 있다는 것이 곧 부의 상징이었다고. 그래서 굳이 보여주기 식으로 복도에 장농이 진열되어 있었던 것. 300년 전만 해도 장농이 곧 슈퍼카이자 명품백과 같은 존재였다니...럭셔리는 계속 재정의되어 왔구나.

처음엔 장농이 왜 복도에 있나 의아했지만.....


2) 괴테의 든든한 예술적 자산이 되어주었던 가풍

최고급 가구와도 같았던 '피라미드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에서 음악을 일상적으로 향유했고,

괴테 아버지의 서가와, 서가와 이어지는 회화 작품의 전시 공간에서 절로 사유의 영감을 받았을 것이며,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선물받은 인형극을 연습했던 극장이 훗날 괴테를 극작가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 가족의 문화적 인프라가 대문호를 낳은 것과 다름 없음을 느꼈달까..

‘괴테,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었군'을 연신 느끼게 하는 독일 상류층의 가풍을 느낄 수 있다.


대문호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내 딸에게 나는 어떤 인프라와 자산을 남겨주고 있을까.


3)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탄생한 공간

사춘기 때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그 발현지에 몇백년 뒤에 내가 와서, 그것도 40대의 아줌마가 되어 보고 있다니..괜시리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BTS 열풍급으로 베르테르 열풍이 불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르테르를 따라한 연미복, 베르테르 이름이 새겨진 향수와 소품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이성과 질서,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처음으로 개인의 감정을 폭발하듯 서술하여 '내 마음을 읽어준 책'이이나 다름 없었다 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와 대중의 결핍을 채워주는 작품은 흥행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괴테의 피땀눈물이 서린 공간

오늘의 괴테 하우스는 내겐 두번 째 방문이자, 딸과 친정 엄마 투어 겸 모시고 온 것이었는데, 첫번 째 방문에서 세세한 방의 소품에 초점을 두었다면, 오늘은 약간의 투어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공간에 더 익숙해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괴테의 작품을 다시 읽고, 조금 더 공부한다면 다음 데리고 올 손님에게는 더 풍성한 스토리로 가이드할 수 있을 듯.


이 곳 외에도 본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 스위스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도 방문했었는데, 이들의 기록도 찬찬히 남겨 봐야겠다.


날씨가 혹독한 만큼, 문화적 피난처가 되어주는 미술관과 박물관들.

이곳들과 조금씩, 깊게 친해져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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