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보다 더 씩씩하게 연착륙 중인 아이를 보며
주재 생활의 초기 성패는 가족의 적응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가족의 적응력 및 만족도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실제로 가족이 적응에 실패해 도중에 귀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혼자 딸을 데리고 해외에 온 나로서는 딸의 적응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독일 생활 만 한 달을 채운 시점에서 돌아보니, 다소 팔불출스럽지만 그녀의 적응력은 실로 경이롭다. 내가 관찰한 아이의 여러 덕목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바로 회복탄력성이다.
이번 주 화요일에는 꽤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딸아이가 타는 스쿨버스가 교통 수칙을 어겨 벌금을 물게 된 것인데, 발단은 독일의 엄격한 도로교통법이었다. 독일 규정상 키 130cm 미만인 어린이는 반드시 카시트나 보조 장비를 갖춰야 한다.
공교롭게도 경찰의 랜덤 검사에 스쿨버스가 걸렸고, 하필이면 경찰이 딸을 샘플로 지목해 키 검사를 했다고 한다. (130cm에 못 미쳐 보였으니 불러낸 것 같다는 추측) 결국 규정 위반으로 학교는 벌금을 물게 되었고, 다음 날부터 스쿨버스에는 딸아이 전용 카시트가 장착되었다고.
본인만 호출되어 키를 재야 했던 상황이 꽤 억울했는지, 아이는 사흘 내내 그날의 사건을 회자했다. 그러고선 키가 빨리 크고 싶단 생각을 했는지, 아침저녁으로 우유를 마시며 스스로 체크 테이블까지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카시트에 앉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본인 입장에서 불미스러웠던 그 상황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억울함에 매몰되어 속상해하기보다, 건설적으로 본인의 액션 플랜을 세워 매일 체크하는 모습을 보니 내 딸이지만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찰한 딸아이의 두 번째 덕목은 바로 만렙에 가까운 상황 파악 능력과 사회성이다. 사실 영어 소통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낯선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어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텐데, 본인 말로 "말은 적극적으로 못 해도, 잘 들으면서 적당히 끼어 어울리고 있다"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담임 선생님한테도 걱정을 표했더니, 'she's doing an excellent job of asking peers for help and joining groups to play with.' 라고.
어떤 날은 친구들이 놀이에 껴주지 않아 혼자 놀았다고 덤덤히 털어놓길래, 그런 날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그 친구들 입장에선 네가 언어를 제대로 구사 못하니 답답해서 그랬을 수 있지 않겠냐고 지극히 T 스러운 위로를 해주기도 했는데...다음 날 물어보니 또 엄청 친구들과 잘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베스트프렌드가 되어 기쁘다며 친구가 그려준 그림까지 보여준다.
관계의 일시적인 단절에 상처받기보다, 다음 기회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아이의 유연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며, 나는 딸아이의 적응력으로부터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운다.
자칫 부정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상황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아는 담대함, 전날의 서운함을 뒤로하고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태세를 전환하는 유연함, 그리고 의기소침해질 수 있는 순간에도 이를 우유 마시기 같은 건설적인 행동으로 이어가는 성숙함까지.
낯선 타국 생활 속에서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의 모습보다, 내가 배워야 할 아이의 모습이 더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고맙고 대견한 내 딸.
아이의 단단한 마음 덕분에 나 역시 이곳 독일 생활에 무사히 연착륙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