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슈타인(Idstein)에서의 일요일
3월이 되면서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가득하다고 좋아했더니, 동료들이 4월 초까지도 눈이 올 수 있다며 두꺼운 겨울 옷을 정리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금요일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온도가 뚝 떨어져 다시 스산한 초겨울의 분위기로 변해버린 이번 주말.
딸과 함께 다녀오고 싶은 소도시 리스트는 풍성하지만, 집에서 평균 왕복 4시간 이상 걸리다 보니 당일치기로는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주는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근교 소도시를 탐색했고, 챗GPT가 추천해 준 ‘이드슈타인(Idstein)’이라는 곳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드슈타인은 여태껏 다녀온 소도시 중 가장 운전하기 즐거운 코스였다. 아우토반을 거치지 않고 우리나라로 치면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었는데, 중간중간 넓디넓은 푸른 평원이 펼쳐지다 언덕 위 동화 같은 마을이 나타나고, 다시 울창한 숲길로 이어지는 등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되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때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코스랄까.
‘작고 조용한 구시가지, 반목조 건물’이 챗GPT가 추천해 준 키워드였는데, 말 그대로 이드슈타인에서는 정말 화려한 반목조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드슈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킬러하우스(Killingerhaus)’는 외벽에 새겨진 정교한 목조 조각들 덕분에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띈다. 여태껏 다녀본 독일 구시가지의 반목조 건물 중 가장 아름다웠다. (지금은 관광안내소로 쓰이고 있다.)
반목조 건물(Fachwerkhaus, 파흐베르크하우스)은 사실 독일 구시가지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건축 양식이지만, 이번에는 좀 더 깊이 파보고 싶어 제미나이에게 물어보았다. 재미있는 내용만 추려보자면 이렇다.
- 기하학적 디자인: 반목조 가옥은 건물의 뼈대를 수직, 수평, 대각선의 나무 기둥으로 먼저 세우고, 그 사이 빈 공간을 진흙, 짚, 벽돌 등으로 채워넣은 건축 양식. 뼈대가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내어, 벽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이 된다.
-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 가옥 외벽의 나무 모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 (X 모양) 는 건물의 뒤틀림을 막아주는 공학적 역할과 동시에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주술적 의미도 있음
- 만(Mann) 형상: 사람(人) 모양으로 겹쳐진 형태는 가족의 번영과 남성적인 힘을 상징
- 세금을 피하는 꼼수: 2층, 3층이 1층보다 조금씩 밖으로 튀어나와있는데, 당시 세금은 '1층 면적'을 기준으로 매겼기 때문에, 위층을 조금 더 넓게 지은 것은 나름의 꼼수였다.
- 부의 과시: 이드슈타인 가옥만의 특징은 그것이 '부의 과시'라는 것. 당시 나무에 조각을 새기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기에, 조각이 화려할수록 돈 많은 집주인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결국 내가 인상 깊게 본 킬러하우스는 진정한 올드머니의 건물이었던 셈이다.
아는 만큼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독일 소도시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그간 무심히 스쳐 지나온 반목조 건물들이 앞으로는 다르게 보일 듯하다. 뻔할 수 있는 소도시의 요소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는 것도 앞으로의 여행에 큰 재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드슈타인에서 두번 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마녀의 탑(Hexenturm)'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랜드마크다. 1240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니, 800년 이상의 세월을 버틴 셈.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마녀사냥과 관련이 있을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드슈타인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의 일부이자 망루였다고 한다. 벽 두께만 해도 3m에 달한다고 하니, 방어라는 목적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마녀의 탑’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은 건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였다고 한다. 실제 17세기 이드슈타인에서도 마녀 재판이 행해지긴 했으나, 이 탑이 마녀들을 가두는 전용 감옥으로 쓰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부족하다고. 이름이 주는 서늘한 선입견과는 조금 다른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이다.
막상 올라가 본 탑 안에는 사실 딱히 볼 것이 없다. 그저 탑 꼭대기를 향해 한 계단씩 오르는 경험 자체가 스릴 있고 재밌었을 뿐이다.
문득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르는 중간중간 무엇이든 체험 요소를 넣거나 화려한 볼거리를 배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그 어떤 꾸밈도 없이 800년 전의 돌벽을 그대로 내어준다. 참으로 정직한 독일식 관광지의 모습.
단촐하고 조용한 구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와 남은 일요일을 보낸다.
낯선 도시의 역사를 한 겹 들춰보고 온 덕분인지, 익숙했던 우리 동네 산책길도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걸어보게 된다. 동네 구석구석을 더 깊이 알게 되면, 내가 머무는 이곳을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이드슈타인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서 오히려 더 좋았다. 마음이 복잡할 때 조용히 사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의 면모를 갖춘 곳.
오늘도 이렇게 독일 소도시가 가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직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풍경들 속에서, 우리의 일요일도 조용히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