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구원자와 함께라면
자세히 풀어놓을 순 없지만, 오늘 회사에서 겪은 일은 참으로 '더러웠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동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꾹 참다가,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돌이켜보니 회사 생활을 하며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던 게 오늘을 포함해 서너 번쯤 되는 것 같다. 마지막 기억이 주니어 시절이었던 14년 전이니, 그간 웬만한 수모나 서러움은 무던히 삭이며 잘 버텨온 셈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별것도 아닌 일에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스스로를 보며 깨달았다. 지난 몇 달간 쌓여온 답답함과 서러움이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나는 40대의 노련한 커리어인이고, 복잡한 상황도 의연하게 받아낼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니까..지난 몇달 간 그저 누르고만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흘린 눈물은 그간 나 스스로도 알아주지 못했던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였다. "나 사실 정말 짜증나고 서러웠어"라고. 나의 감정을 그간 내가 온전히 알아채지 못했음을 자각했다.
한국처럼 퇴근 후 술 한잔 기울이며 남편이나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동료를 붙잡고 하소연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퇴근 무렵 겪은 일이라 곧장 집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으면 한결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며 딸아이에게 오늘의 서러움을 털어놓았다.
아이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더니 조용히 나를 안아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XX(딸 이름)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며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아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더니, 명상 가이드처럼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자,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하세요. 들이쉬고, 내쉬어 보세요.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위로합니다.
오늘도 참 잘했다, 스스로를 토닥여주세요. 토닥토닥.
마음이 괜찮아지면 눈을 뜨시고, 아직 괜찮지 않다면 좀 더 감고 나를 토닥토닥 해주세요."
9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예사롭지 않은 위로에 놀라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느냐 묻자 아이는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여전히 미스테리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끝나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고, 아이의 품에 안겨 잠시 가만히 있었다. 감정을 다 털어내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문득 독일에 오기 전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힘들겠지만 딸과 함께이니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깜깜한 밤에 혼자 산을 넘기는 힘들어도, 아이가 곁에 있다면 엄마는 그 산을 거뜬히 넘어."
오늘은 정말 그런 날이었다. 딸아이가 내 곁에서 함께 산을 넘어주는 느낌, 내 진정한 반려자가 되어준 느낌. 한참을 내 볼에 얼굴을 부비고 뽀뽀를 해주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철없는 9살 모드로 돌아가 재잘거린다. 방금까지 내 곁에 앉아있던 어른 같던 모습은 어디갔지. 참으로 카멜레온 같은 내 딸.
너와 함께여서 참 다행이다. 덕분에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음 산을 넘어갈 기운을 얻는다.
유독 남편과 친구 JS가 그리워지는 밤이지만, 오늘은 딸 덕분에 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