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재 마케팅의 공식, 생소한 기술을 브랜딩할 때도 통할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내게 맡겨진 첫 업무는 우리 팀이 런칭하는 '고객경험관리(CRM) 시스템'의 전략적 가치를 해외 법인 이해관계자들에게 설득하고 내재화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낯선 시스템을 홍보하는 수준을 넘어, 이 도구가 현업에서 왜 필요한지 그 당위성을 피칭하여 실질적인 사용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시스템 활용이 일하는 방식의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조직 문화를 형성하는 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변화관리(Change Management)'라고 한다.
9년 만의 새로운 일, 과연 그 결과는?
14년 간 커리어를 이어오면서, 9년을 화장품/스킨케어 제품을 마케팅하는 브랜드 매니져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이런 새로운 일에 도전한 이유는 심플했다. 더 이상 업무에 자극도, 배움도 없다는 느낌이 매일 들었고, 무엇보다도 세상은 급변하는데(다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샤우팅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 판매 및 마케팅의 framework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로지 새로움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호기롭게 이직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내가 봉착한 '난이도 최상'의 업무는 낯선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 자체보다, 내가 습득한 내용을 쉽고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일이었다. (촉수 끝까지 문과생인 데다 이런 시스템을 써본 경험도 전무했으니, 이해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시스템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고요, 어떤 기능을 지원하냐면요... 데이터는 어디서 연동되냐면요..." 여태껏 내가 마케팅했던 제품은 모두 '물성'이 있는 하드웨어였는데, 소프트웨어를 설명하려니 나부터가 '이건 원래 많은 설명이 필요한 거야'를 전제로 깔고 있었다. 구구절절, 최대한 실질적인 기능에 집중해 드라이하게 풀어내는 데만 급급했다.
말랑말랑한 화장품을 팔다가 매력 없어 보이는 시스템 소개 문구를 쓰고 있자니 너무 따분했다. '굳이 내 이력으로 이 일을 해야 하나?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수억 번 고민했다. 그렇게 시스템을 소개하는 30페이지 남짓의 문서를 들고 장장 2개월 동안 상사에게 4번 정도 까이며(?) 깨달은 내용을 정리해 본다.
물성 없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는 일, 소비재 마케팅과 본질은 같다
1)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 비유, 숫자, 시각화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시스템 자체는 건조한 IT 도구에 불과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화자까지 딱딱한 '대기업 부장님' 페르소나일 필요는 없었다. 구구절절한 문장보다 이미지 한 장, 절묘한 비유가 훨씬 직관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예를 들어, "데이터는 흩어져 있으면 쓸모가 없다. 수집하고 관리해야 가치가 생긴다"를 전달하기 위해 시각화된 이미지를 개발했다. 또한, 통합된 데이터의 가치를 설명할 때 **"백만 명에 대한 하나씩의 데이터를 갖는 것보다, 한 명에 대한 백만 가지 데이터를 갖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라고 표현했다. 돌이켜보면 소비재 마케팅 시절 가장 많이 쓰던 '3초에 하나씩 팔리는 앰플', '10명 중 9명이 재구매한 제품' 같은 카피라이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접근이었다
2) 화자(Speaker)를 바꿔 심리적 장벽을 낮춰라 글로벌 CRM 기업 세일즈포스(Salesforce)는 다양한 캐릭터를 활용해 어려운 솔루션을 설명한다. 소프트웨어처럼 낯설고 어려운 대상을 알릴 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다.
얼마 전 대한항공 기내에서 본 탑승 안내 영상이 떠올랐다. SM의 남자 아이돌들이 춤을 추며 안전 수칙을 설명하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그렇다! '누가(=매력적인 아이돌이)', '어떻게(=춤추며)'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달력은 천지 차이가 된다.
이 점에 착안해 나도 텍스트만 가득하던 설명 방식에서 벗어나, 사용자 페르소나별 브이로그(Vlog) 형태의 애니메이션 영상을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줄창 텍스트로 떠들던 시절보다 이해관계자들의 공감과 호응이 훨씬 뜨거웠다.
3) 기능이 아닌 '사용자의 변화된 일상'을 팔아라 소비재 마케팅의 핵심은 제품이 소비자에게 줄 '감성적·이성적 혜택(Benefit)'을 정의하는 것이다. 내가 과거 담당했던 데오드란트의 경우, 제품의 기능은 '땀 억제'였지만 우리가 판 것은 '케어로부터 오는 자신감'이었다. 이를 소구하기 위해 타겟의 라이프스타일과 텐션(Tension)을 집요하게 분석했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였다. 타겟(사용자)이 처한 상황을 그려가며, 이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바꿔 놓을 일상은 어떤 모습인지, 그들의 어떤 Pain Point를 해결해 줄 것인지를 뽑아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스토리의 중심에 두었다.
물성 있는 제품을 팔던 마케터의 커리어와 기술을 이해시켜야 하는 CRM 기획자의 업무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어디서든 먹히는 역량'을 키우면 업계와 분야를 넘나드는 과감한 이직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경험과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그것을 이종 환경에 적용하는 '적응력'이야말로 커리어 개발의 핵심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나의 적응력을 계속 시험대에 올리는 이직은 꽤 건설적인 시도였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