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첫째 아이, 둘째 아이 각각과 대치하는 상황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등짝을 스매싱하면서 인지했다. '나중에 또 후회하겠구나' 하지만 화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 정도 했으면 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겠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향해 화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구는 아이에게 참다 참다 이 정도 화를 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내게 남는 것은 후회와 죄책감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물론 내게도 큰 상처로 남을 뿐이었다.
그날 밤, 남편에게 아이들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남편은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웨인 다이어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자책감은 그 자체가 보상이며 그런 행위를 되풀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아이들에게 화내고 후회하고를 반복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며 내 잘못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로 만들었다.
첫째 아이의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이 있어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날은 훈육에 대한 부모교육 강의가 마련되어 있었고 지금 내게 딱 필요한 강의다 싶어서 열심히 필기했다. 훈육이란 '아이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감정조절을 잘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행위'라고 했다. 즉, 혼내는 것은 훈육과 다른 개념이다. 물론 나는 두 개념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기란 쉽지 않고 특히나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면 고치기란 더욱 힘든 것이었다. 내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나의 훈육은 대부분이 혼내는 것과 일치했고, 때론 '화'를 곁들이곤 했다.
친정에서 머무를 적에, 친정아버지께서 언젠가 한 번 '네가 애들 화를 더 크게 만들고 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처음 아빠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버릇이 나빠질까 봐 징징대거나 쓸데없는 고집을 피울 때 단호하게 입장표명을 한 것으로 내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간격으로 일어난 두 아이와의 대치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어느 순간, 내가 아이들에게 화냈던 모습이 머릿속에 재생되면서 아빠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르며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빠의 말씀이 맞았다. 나는 아이들과 괜한 기싸움으로 그들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건 네 잘못이다.'라는 생각으로, 그들의 감정이 고조로 치달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감정이 그렇게 고도로 치닿게 되면 결국 그것은 내 화가 더 커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악순환의 고리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1. 감정조절에 서툰 아이들이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을 나는 받아주지 못했다.(달래지 않는다.)
2. 그런데 아이들의 그 부정적인 감정은 순식간에 고조되고 그렇게 감정이 치달아서 뱉어내는 짜증과 울음 혹은 그릇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3. 결국 그런 행동은 다시 나를 화가 나게 만든다.
이 뫼비우스의 띠의 굴레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갇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책장을 뒤지다 보니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이 있어서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거기서 말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인데, 나는 아이의 감정을 인지는 하지만 받아주는 것이 쉽지 않은 케이스였다.
결국 내가 기를 꺾고 아이들을 받아주기로 결심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인지를 쉽게 하는 나로서는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괴로웠는데, 그것은 결코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아이의 모든 행동들이 지니고 있는 의도를 읽어내고 그것을 받아주겠다는 그 마음먹기가 나는 힘들었던 것 같다.
아이를 위한 하루 한 줄 인문학을 읽는데 독서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독서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에 나온 내용을 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바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가령 책에서 제시한 구절은 <근사록집해>중의 한 구절이었는데,
최하급의 관리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루어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자기 상황에 빗대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영어 실력에 상관없이 영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시를 들었다. 그 부분을 보면서 내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모가 당연히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나 도구로 보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에서 부모교육을 들으면서 열심히 필기하다 어느 순간 필기를 멈춰버렸다. 강사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내게 중요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아닌 무엇보다 아이들의 존재를 존중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있어 그런 마음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아이들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 왜 저 모양일까?'라는 생각으로 화를 내는 것을 정당화했음을 인정한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나의 다짐이다.
앞으로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먹기로 한 이상 더 이상 등짝 스매싱은 없을 것이다. 잘못된 행위를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나는 변하고 싶다. 무뚝뚝함을 핑계로 어색하다는 것을 핑계로 내색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고 있다. '엄마는 원래 잘 안 웃어', '엄마는 원래 무뚝뚝해'라는 꼬리표를 떼고 아이들에게만큼은 더없이 친절한 엄마가 되기 위해 나의 고집을 꺾어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표지 사진 : Photo by Benji Aird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