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 대한 욕심 버리기
2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 콧물이 나던 둘째 아이로 부터 시작된 감기는 나와 첫째 아이한테로 옮겨졌고, 결국 셋다 병원에서 감기약을 받아오게 됐다. 그즈음 해서 점차 잠잠해지는 듯싶었던 코로나는 특정 지역에서 순식간에 확진자가 늘어나는 사태를 맞이했고, 결국 주말이 지나서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걸로 하고는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감기약 덕분인지 주말에 푹 쉰 덕분인지 나도 아이들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된 월요일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하늘을 보니 아이들에게 콧바람을 쐐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에서 놀고 마트에 다녀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놀이터에서 노는 내내 마스크를 벗어대던 둘째 아이를 달래면서 마스크를 다시 쓰게 하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지만 미세먼지가 좋은 날이라 그런지 한가한 놀이터에서 햇빛을 쬐고 있으니 밖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밖에 나오니 한결 나아지는 것도 있었다. 늘 그랬듯이 분리수거 쓰레기를 정리하시는 경비 아저씨들의 모습과 세탁소 아저씨의 다림질하는 모습, 학원가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그저 마스크만 하고 있다는 것뿐 집 밖의 세상은 여느 일상과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아이들은 마트에 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고자 노란 싹이 튼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여주었는데,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킥보드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따라가는데 따뜻한 바람과 햇살이 느껴졌다. 이렇게 겨울이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은 흐트러졌지만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봄은 오고 있었다.
킥보드를 타고 신나게 달려 도착한 마트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사고 요구르트 아주머니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아주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늘 계시던 장소에 계셨고, 나는 아이들이 먹을 요구르트와 음료를 주문했다.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요구르트 아주머니들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요구르트 차가 최신식으로 바뀐 것 말고는 어쩜 복장은 그대로인 것 같다.
그런데 언제 봤을까? 둘째 아이가 아주머니의 배달차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용케 사탕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재빨리 그 사탕을 아이 눈이 닿을 수 없는 조금 높은 주머니에 넣어버렸고, 아이는 자기가 봤던 사탕이 순식간에 없어진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탕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떼쓰기와 울음이 시작됐다. (첫째 아이의 충치치료를 몇 번 하면서 사탕을 먹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력해졌다.)
낮잠이 찾아오기 시작했던 탓도 있을까, 울음은 쉽사리 그칠 줄을 몰랐다. 아주머니로부터 구입한 요구르트로 아이를 달래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고, 아주머니 역시 어떡하냐며 이런저런 말로 아이를 구슬리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엔 떼쓰는 아이를 두고 첫째 아이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겁주기 용이 아니라 진짜 가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막상 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누구를 닮아서인지 똥고집인 아이는 나와 첫째 아이가 멀어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목이 터저라 더 큰 울음을 시작했다. 마트에서 샀던 품목들은 그다지 무겁진 않았지만 아주머니로부터 구입한 요구르트와 음료들 덕분에 팔이 아플 정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고, 햇살은 점점 뜨거워지면서 등줄기로 땀이 한 방울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근처 직장에서 나온 직장인들이 아이 우는 목소리에 반응하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물론 그들의 수군댐이 우리의 모습에 기인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울음을 그치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탕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 혹시나 사탕을 찾아주게 되면 아이는 울면 다 된다는 자신의 고집을 옳다고 믿게 될 것이고, 첫째 아이가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달라고 떼쓸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단호해져야 했다.
어쨌든 다시 아이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것이 안심이 된 건지 어쩐지 이제는 안아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겨우 어르고 달래서 울음이 조금 잦아들도록 안아주는 걸 택했지만 장바구니에다가 아이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 지라 채 10미터도 걷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이가 타고 온 킥보드는 어찌할 것인가. 다시 킥보드를 타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기에 그저 조금 기다렸다. 얼마 후, 조금 진정이 된 틈을 타서 아이의 관심사를 돌렸더니 아이는 결국 사탕을 포기했고 킥보드에 올라섰다. (가는 길에 또 한 번 울음이 터지기는 했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고자 했던 내 계획은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외출했던 시간은 한 시간 반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혼이 다 빠질 만큼 지쳐버렸다. 내일은 그냥 어린이집에 보낼까 싶던 차에 친구로부터 '휴원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절로 커피가 마시고 싶어 졌다.(여러 가지 이유로 커피를 끊으려고 하는 중인데,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앞으로 2주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무엇인가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아이들과 집에 있으면서 어린이집에 가는 것 못지않은 재미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크디큰 나의 오산이었다. 그냥 아이들과 있는 내내 짜증만 내지 않아도 선방하는 것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혹은 의미 있는 활동을 제공하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보다는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어떤 교육적인 활동보다도 아직은 정서적인 지지가 절대적으로 더 중요한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나는 계속 잊어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자꾸 해줄수록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어떤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 혹은 상상에 걸맞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면(그건 당연한 것인데)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지쳐버리는 것이다. 이건 필시 스스로 만드는 무덤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작 아이들이 바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따뜻한 말과 시선 그리고 포옹일 텐데 말이다.
시행착오는 늘 반복된다. 그 반복 가운데 그래도 차츰 나아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예전에 비해서 자책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화를 내는 것이 그만큼 줄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책하는 것은 그저 자기 위안일 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쓰면서 다시 되새기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있다. 100점과 0점을 넘나드는 엄마보다는 그냥 70점짜리 엄마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거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누구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해주어야지 하는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두터운 신뢰를 쌓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욕심 없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잘하려고 애쓰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돌이켜 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욕심을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