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 가면 잠 못 이루게 될까

90년대 미국 감성에 대한 추억

by 이유진

예전과 달리 주말 밤이면 뭐 하나 볼까 싶은 마음에 넷플릭스를 뒤적이게 된다. 그리고 넷플릭스라는 것이 이렇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이 었나 싶을 정도로 세상이 정말 변했구나를 실감한다.


나는 80년대 생으로 비디오라는 매체로 영화를 접했다. 어린이 만화를 극장에 가서 본 적도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고, 고등학생이 되어 극장에 몇 번 가게 된 것을 제외하면 나의 영화 감상은 비디오나 DVD 대여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나 한창 많이 봤던 초, 중학생 시절에는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나의 참새방앗간이었고 장래희망으로 비디오방 주인을 적어낸 적도 있을 정도로 그곳을 좋아했다.


당시는 한국영화보다는 외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미국 영화나 홍콩영화에 매료되어 한동안 빠져 지냈다. 주말이나 방학 때에는 그야말로 쌓아놓고 보았는데,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을 찾아서 영화를 보다 보니 꽤 많은 영화를 보게 됐고, 자연스레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기를 꿈꾸었다. 나 혼자 영화 리뷰 잡지도 만들기도.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품평회도. 예술영화를 보면서 그 어려움에 고뇌하기도. 그야말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쏟아부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불타오르던 열정은 자연스레 식어갔고, 집중해서 보던 영화들은 어느새 킬링 타임용으로 한 두 번 찾아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드라마로 옮겨져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근래에 드라마 몇 편을 몰아보면서 에너지 및 시간 소모에 이건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말 밤은 왠지 아쉽게 느껴져서 영화를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뒤지는데, 영화를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왜인지 최근 영화보다는 옛 영화가 끌리는 덕분에 90년대부터 2000년 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억의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뒤적거리다 보면 당시의 영화들은 거의 내가 다 본 것들이라 그중에서 뭘 봐야지 이 시간이 알차고 보람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보고 나서 마음이 힘들거나 머리 아픈 혹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영화들보다는 그저 마음이 따뜻해지는 로맨스나 드라마 위주의 영화들을 찾게 되기 때문에 그 반경이 더욱 좁혀져 리모컨 버튼만 자꾸 위아래로 눌러댄다. (그럴 때면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관련 콘텐츠를 찾아봐도 대부분이 내가 이미 본 목록들이다. 그걸 보면서 왜 이렇게 많이 봤냐 싶은 생각에 아쉬움만 한가득인데 지난 주말에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골랐다. 커피숍 이름으로도 익숙한 sleepless in seattle.


movie_image (3).jpg
movie_image (2).jpg
movie_image (4).jpg

어쩌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주인공들의 패션이나 헤어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현재를 알고 있기에 리즈 시절을 보는 것이 왠지 반갑기만 하고, 촬영에서의 특별한 기법도 절정에 이르는 기가 막힌 스토리도 없지만 (어쩌면 정말 진부할 수도 있는) 잔잔한 이야기를 보는 것이 오랜만에 너무 좋았다. 앳띈 얼굴의 보조개가 너무 귀여운 맥 라이언과 다소 웃긴 머리의 톰 행크스 아저씨. 그리고 조나라는 이름 모를 아역배우가 너무 귀여웠다. 아마 내가 지금 아이가 생겼기 때문일까. 엄마가 떠나고 아빠와 단 둘이 생활하는 일상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과감히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넘어간 아이와 그를 쫓아서 만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현실에서였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기다리는 와중에 약혼녀가 자신이 준 반지를 돌려주며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를 만나러 가겠다는데, 웃으며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남자라니. 현실에서라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진짜 영화니까.


movie_image.jpg
movie_image (7).jpg

그 시절 미국 영화 속의 크리스마스는 늘 흥겹고 캐럴로 넘쳐난다. 아파트가 아닌 그야말로 그림으로만 그리던 지붕이 있는 집 모양의 집에 집집마다 문 앞에 걸려있는 리스며 반짝이던 전구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들. 그런 분위기를 막연히 동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비가 내리는 시애틀, 늦은 밤 자동차 안에서 주파수를 찾아가며 듣는 라디오와 기사를 쓰기 위한 타자기, 비행기 예매를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던 도스 화면의 구식 컴퓨터. 그런 것들이 촌스럽다는 생각보다는 아련한 향수를 가져다주었다. 아마 그 풍경이 외국이라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차피 당시에도 영화 속에 그려지는 모습들은 나의 현실이 아니었기에 지금에도 역시 그 모습들은 내가 이 번생에서는 겪어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쿡'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 미국에 대한 로망이 있다. 90년대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일상의 풍경들이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진데, 그 시절의 미국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반갑고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유선 전화기를 사용할 그 시절, 스마튼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 지금 보다는 더 행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는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미국 영화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내가 참 영화를 많이 봤구나 싶다. 물론 그곳이 내가 그리는 만큼 멋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비해서 너무 멋져 보였고 요즘 말로 힙해 보이는 그곳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만큼 살기가 좋지 않은 나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뭐가 됐든 그 시절 미국 영화는 나에게 여전히 환상과 같은 그런 일상을 꿈꾸게 한다.


언젠가 한 번 시애틀을 가 볼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또 어떤 기분이 들까? 영화처럼 시애틀에 가면 잠 못 이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들뜬 기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또 어떤 추억의 영화를 찾아 볼런지. 앞으로 한 동안은 미국 감성에 빠져 지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OST 중 When I fall in love



* 표지 사진 및 글에 첨부된 사진은 포털 사이트의 영화 공식 사진들을 사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