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벗으세요'라고 말할 수없기에

세대 간의 이해와 공존에 대해

by 이유진

요즘 학교에서 줄넘기를 한다. 협력 강사 선생님께서 오셔서 음악 줄넘기를 가르쳐주시는데, 체육을 싫어할 것 같은 여학생들도 곧잘 하는 운동이다.


요 며칠 미세먼지도 좋고 춥지 않아서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하다 보니 여간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지난 시간에는 여학생 한 명이 갑자기 토할 것 같다면서 머리가 아프다는 증상을 호소했는데, 아마 갑자기 뛰면서 과호흡이 온 것 같았다. 보건실까지 이동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아이를 일단은 심호흡을 통해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벤치에 앉히고 등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잠깐 벗으라고 했다. 운동장인 데다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크를 벗고 숨을 편하게 쉴 필요가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아서 벤치에 좀 누워있으라고 했다. 다행히 벤치에는 그늘이 들어 쉬기에 적당했다. 아이는 아이들을 등진채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가로누웠다. 그제야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보건실에 가자고 하니 괜찮다면서 잠깐만 더 누워있겠다고 했다. 빈혈기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아이 한 명도 그랬다. 체육을 하고 나서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갑자기 숨을 과하게 쉬고 주저앉을 만큼 힘들어하는 아이를 잠깐 쉬게 한 뒤 보건실에 데리고 갔었는데 동공 상태며 호흡 상태를 확인하신 보건 선생님은 아마 마스크를 쓰고 갑자기 운동해서 그럴 거라며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증상이 비슷해 보였다. 그날 바로 학부모 알리미로 줄넘기 수업이 10시경에 있으니 조금 일찍 밥을 먹고 등교하기를 안내했다.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데, 굶고 학교를 올 수는 없으니 일찍 먹고 소화를 시킨 후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 다시 줄넘기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수행평가가 있는 날이라 아이들은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한 명씩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서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몇 번의 연습을 한 뒤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 천천히 뛰기부터 빠르게 뛰기 좌우로 뛰기, 한 발씩 엇갈려 뛰기, 가위바위보 뛰기 등 다양한 동작들을 했다. 지난번에 힘들어했던 그 친구는 다행히 오늘은 아무 문제없어 보였다. 아이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였지만 그래도 각자 상황에 따라서 잘 대처하고 있었다. 힘든 친구들은 중간중간 알아서 쉬도록 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은 마음에 쉬고 있는 아이 한 명의 줄넘기를 빌려서 음악에 맞춰 따라 해 보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잘하는 아이들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이어하는 데에 반 해 나는 중간에 두세 번 정도는 줄에 걸려 다시 해야 했다. 물론 연습이 필요했겠지만 그래도 한 번도 걸리지 않고 해내는 아이들이 대단해 보였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체력이 많이 안 좋은가 걱정했었는데, 아이들의 체력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를 뛰었는데도 한 번 뛴 나보다 쌩쌩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평소 달리기를 통해 이 정도 뛰는 건 별거 아니다고 얕잡아 봤던 나의 오만이었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잘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아이들은 잘 뛰었다. 이제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마스크를 쓰고 운동을 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10분가량 줄넘기를 더했는데, 아이들의 마스크가 너무 답답해 보였다. '마스크를 벗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얼굴이 되어버린 이 마스크가 오늘만큼 답답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간중간 쉬는 타임에도 아이들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들의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 보여서 괜히 슬퍼졌다. 작년에 비해 아이들은 또 한 번 이 삶에 익숙해졌다. 운동할 때에도 당연히 마스크를 쓰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에 잠깐 벗는 것 외에는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당연함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던 시대가 있었고 이전 시대가 당연하게 누렸지만 지금의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당연하다'는 말이 낯설게 다가온다. 세대차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누군가 누구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근본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에 까지 의문이 든다. 코로나 이전을 겪어 보지 않은 세대들이 태어나고 있는 지금, 그들이 물론 기억의 인식이 생기기 전에 코로나는 종식되어야 하겠지만, 혹여라도 이 상황이 길어진다면 그들에게 그 이전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꼰대 이야기를 웃음으로 승화('라테'는 말이야)시키는 젊은 세대들과 기성세대들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것 같다. 등원 전에 알아서 마스크를 척척 쓰는 우리 집 꼬맹이들과 나의 간격만큼이나 말이다.


지금은 함께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조금 더 자라면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를 우리 아이들의 세대와 공존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내가 겪은 시대를 모르는데, 내가 겪은 삶을 모르는데, 그들에게 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먹혀들 것인지 새삼 의구심이 든다. 나는 구닥다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가 하는 말들은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있어 괜한 어불성설은 아닐까 싶다. 젊은 세대의 기발함과 열정, 기성세대의 안정감과 노하우가 한데 이루어지는 것은 나물과 밥을 비벼먹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과자에 밥을 비벼먹는 것만큼이나 괴기한 일은 아닐까 싶어 지니 괜스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느낌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저 들어주기나 잘하자 싶다. 단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공존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스크를 벗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스크 속에 가려 잘 들리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는 있지 않을까? 귀는 두 개이지만 입이 하나인 이유가 있다. 애들한테 잔소리로 이야기했지만 결국 나한테 하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려면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자님의 말씀에 따르면 잘 듣는 것은 60이 돼서나 가능한 일이니 '서로'는 힘들 것 같고, 아직 60은 아니지만 그들보다 나이 든 내가 먼저 해야겠지? 그나저나 나는 아직 불혹(不惑)도 안됐는데 이순(耳順)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립(而立)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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