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청소년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부모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시절을 다 겪어 왔기에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하기엔 우리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고,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책을 쓰는 자도 어른이기에 완벽히 그들의 세계를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겪어가고 있는 세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아동문학 혹은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노력한다.
이꽃님 작가를 좋아한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던 카페의 장소와 풍경,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도서관에 갔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는 바로 대출을 했다.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이라는 제목도, 행운이라는 '나'의 시점에서 그려가는 문체도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명랑한 문체와는 달리 이야기의 소재는 상당히 무거웠다.
책은 가정폭력을 당하는 두 아이를 그린다. 한 명(은재)은 아빠로부터 신체적 폭력을, 그리도 또 한 명(우영)은 엄마로부터 정신적(언어적) 폭력을 당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고작 15살 밖에 안된 아이들. 다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어른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들은 부모로부터의 폭력을 그저 묵묵히 버텨낸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체적 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은재로 보이지만, 나는 읽을수록 우영이에게 더 마음이 가게 됐다. 언뜻 보기엔 그래도 은재가 우영이보다 나은 처치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어쩌면 은재보다 우영이와 같은 친구들이 더 많겠다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가끔 그런 부모들이 있다. 온갖 폭언과 폭력에도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온순하거나, 별 탈 없이 커주는 거라고 믿는 등신 같은 부모들이. 안일한 당신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아이들은 당신보다 힘이 세지고,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 않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건 인생이 던지는 바보 같은 장난이 아니다. 그건 인생의 법칙이다. <행운이 너에게 오는 중>
세상의 모든 폭력은 잔혹성을 띠기 마련이지만 신체적 폭력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언어적, 감정적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은 후자에 더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육아를 해 본 엄마들은 첫째는 혹은 아이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을 처음 알았을 때, 가끔씩 내가 아이들을 그렇게 대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화들짝 놀란 기억이 있다. 일을 하는 엄마든 일을 하지 않는 엄마든 육아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알게 됐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잘 참아낸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욱하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비겁하게도 나의 '화'를 아이의 말 안 들음을 핑계로 들면서 그들에게 풀어내는 것이다.
'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다. 우리는 대부분 나보다 강한 존재 앞에서는 나의 감정을 컨트롤하려고 하지만 보다 약한 존재 앞에서는 쉬이 감정을 드러낸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화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자식이라서 화가 나는 게 맞다. 나 역시 그렇다. 교육 경력이 늘어가면서 좋은 점은 반 아이들에게 점점 관대해진다는 것이다. 확실히 초임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허용적인 마음이 커졌다. 남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 자식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을 손님처럼 대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막연히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세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 끔찍이 자녀를 사랑하지만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에 화도 많이 낸다. 남의 자식한테는 아깝지만 내 자식한테는 아깝지 않을 모든 것들에 화도 포함된다. 특히 부모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자식이 뭔가 흠잡힐게 걸리는 순간 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걷잡을 수 없이 그 힘을 폭발시킨다.
그것이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라면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것이다. 부모 역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와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 채 작중 우영의 엄마처럼 끊임없이 아이에게 비난의 말을 퍼붓는 것이 일상이 된다면 그것은 크나큰 문제가 된다. 비난의 말이라고 해서 아이를 향해 쌍욕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이에게 전가시키면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바람, 희망 등 온갖 것들을 아이를 통해 이루려고 하고,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면서 아이를 닦달한다. 자녀의 성취를 혹은 자녀의 서투름과 시행착오를 자신의 것으로 일치시키면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의 희로애락을 건다. 본인이 내뱉는 모든 말들이 아이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이 아이가 잘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 여기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닦달할 뿐이다. 자신의 말에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작중 우영의 엄마만큼은 아니라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부모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러닝 하이]의 민희 엄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민희가 맏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짊어진 짐을 아이와 동등하게 나누려고 한다. 남동생은 아직 어리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라 열외로 두면서 민희에게는 온갖 집안일을 부가하고 때론 자신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친구의 역할까지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엄마는 민희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지를,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우영의 엄마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은재의 아빠보다는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우영과 민희의 엄마 같은 부모가 더 많을 것이다.
물론 부모 역시 자녀에게 의지하고 기대할 수 있다. 애지중지 키운 내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보상심리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녀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녀가 성인이 된 후라도 늦지 않다. 기대란 풍선을 불기 위해 내뿜는 입바람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계가 없고 오히려 아이가 잘하면 잘할수록 더 잘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 입김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풍선은 어느 순간 터져버린고 만다. 입김은 끊임없이 생산되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풍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아이가 뱃속에 있던 순간, 처음 태어나던 순간, 갓 돌을 넘기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때의 바람이란 오직 열 손가락만 제대로 달려 나오면 좋겠다는 것,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좋겠다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의 인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매 순간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잘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남들에 비해 뒤쳐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늘 걱정만 하지만 아이들은 때가 되니 배움을 통해서 혹은 스스로의 깨우침을 통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늘려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나 역시 우리 부모의 기쁨이 되고자 그들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내 인생의 목표를 삼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 자기 밥그릇은 물고 태어난다는 옛 할머니들의 말씀처럼 아이들을 너무 재촉하며 애달파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고통만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최선의 노력이 내가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임을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을 읽으며 여실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