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며 뚜벅이로 살던 것이 일상이었던 나는 어느새 자차를 타고서 운전하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아줌마가 되었다. 그래서 가끔 지하철을 타게 될 때 보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다양한 패션에 내가 평소에 보는 사람들만 만나면서 살고 있구나를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나 휴직을 하면서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보는 사람들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동네에서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매번 만나는 사람들이 동네 아이들과 이웃 아주머니들로 한정적이 돼버렸다. 그렇다 보니 또 나의 세계는 좁아지고 내가 보는 것만이 맞다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인들을 만나러 오랜만에 도심으로 나갈 때 지하철을 타게 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약속을 잡게 되면 다양한 패션을 한 이들을 보게 된다. 핑크색으로 탈색한 머리카락, 짙은 화장 등 크롭탑은 빈번하고, 남녀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액세서리와 힐끗힐끗 보이는 문신들까지. 특히나 대범하게 보이는 크고 화려한 모양을 볼 때면, 촌스러운 아줌마 티를 내듯 나도 모르게 토끼눈으로 쳐다보게 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듯한 그것이 내 눈에는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반해 요즘은 그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진 탓인지 문신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아무래도 노출의 계절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얼마 전 외출을 했을 때도 그랬다. 막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해서 지하철에서 내리려는 찰나 마스크 때문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커트머리를 한 어린 친구가 화려한 문양의 그림이 그려진 팔뚝에 랩을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청바지에 반팔티를 입고서 약간 불그스름한 팔뚝이 조금 아픈 건지 랩으로 칭칭 감은 팔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 크게 부어오르진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붉게 변해있는 피부를 보니 아마 방금 시술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아플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저런 아픔을 참아내면서 저런 것을 몸에 그리는 그 의도(?)가 몹시 궁금해졌다. 작은 문양, 작은 글자도 아니었고, 팔뚝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가득 메운 그림을 보며 저걸 부모에게 감출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과 상의하에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그런 꼰대 같은 생각만 머릿속에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몇 주 전에 캠핑장에서 만났던 나의 사촌동생 팔뚝에 새겨져 있던 레터링 문신이 떠올랐다. 그걸 보자마자 촌스러운 아줌마 인증을 하는 냥 '이게 뭐냐'고 소리를 쳤던 순간의 외침까지 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촌동생은 나랑 고작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건 그녀의 빠른 생일 때문으로 학년으로 따지면 엄연히 두 학년 터울밖에 나지 않는데 나는 왜 이렇게 꼬장꼬장한 생각을 하고나 있는 것일까. 아직 아이는 없지만 동생 역시 결혼을 했고, 자기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성실한 납세자로 문신을 하고 말고는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 된 엄연한 어른인데 내가 뭐라고 거기다 대고 눈살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했던 것인지... 교사라는 직업적 차이 때문으로 여기기엔 아무래도 나의 성향 때문일 탓이 크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는 저 시절로 돌아간다면 저런 걸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리면 사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고를 생각할 것 없이 '지금' 내가 저런 문신을 할 것인가로 되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No'이다. 나는 20대로 돌아가든, 결혼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든, 아이를 낳기 이전으로 돌아가든, 선생님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든 상관없이 아마 문신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무섭다. 물론 지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다시 지운다는 것은 문신이라는 정의에 상반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또한 아이러니한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내 기준에서는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든 영원하다는 의미가 왠지 떨떠름 하다. 지금껏 많은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내 나름의 결론이라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그저 '문신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수도 있구나. 옛날처럼 조폭들을 연상시키는 낙인효과가 아니라 그냥 패션의 일부로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넓은 마음가짐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 혹여 내 자식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뜯어말리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말이다. 안전한 곳에서 시술받을 수 있도록 같이 알아봐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이겠지만 이상은 이상일뿐. 혹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무슨 정신 나간 소리 하냐고 소리치지나 말기를 기도해본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의 마음과 시야도 더 자라고 넓어질 수 있도록 오늘도 열린 마음과 깨어있는 이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한 수련을 이어갈 뿐이다. 인생은 참으로 배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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