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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Jun 09. 2022

서두르지 마라

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여유

시어머니는 평소 나에게 일언반구 뭐라고 하시는 일이 거의 없지만 유일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건 '서두르지 마라'는 말씀이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내가 어디를 가봐야 한다고 할 때나, 혹은 급하게 아이들을 맡길 일이 있어 시댁에 들렀다 다시 나가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항상 '며느리,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요즘, 대수롭지않게 들었던 그 말이 시시때때로 떠오른다. 


나는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 후다닥 빨리 끝내는 스타일에 가깝다. 일처리는 빠르지만 당연하게도 가끔은 실수가 발생한다. 물론 장단점은 있다. 어떤 일을 도장 깨듯 쳐내는 방식은 누군과와 협업하기에 나쁘지 않다. 적어도 응답이 빠르니 다음 일을 진행하는 것이 수월하다. 하지만 명품은 1퍼센트의 차이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와 관련한 일화로 최재천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는 편집자가 자신의 원고를 수정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 그건 본인이 원고를 처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보통 마감 2-3일 전에 원고를 넘기고, 그렇게 넘기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퇴고를 하며 누군가가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상태의 원고를 넘긴다는 것이 요지였다. '프로'란 바로 이런 거구나. 어느 정도 고쳤다 싶으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후다닥 발행해버리고 마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야말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어머님의 말씀과 교수님의 말씀이 왠지 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일상의 곳곳에서 '서두르지 마라'는 말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특히 분할 매수, 분할 매도의 원칙에 그건 아주 핵심 요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그렇다.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먹는 순간 어떻게든 그 일이 내 머릿속에 그려진 대로 진행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가령 아이들을 등원시키는 길에 바로 외출을 하는 것이 머릿속 계획으로 세팅이 되면 일단 어떻게 해서든 그 일이 가능하도록 서두르기 시작한다. 현재 나의 준비 상태와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스럽게 준비를 하면 꼭 빠트리는 것이 있고,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꼭 발생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할 때도 그렇다. 아이들을 재촉하면서 후다닥 나오다 보면 결국 뭐라도 꼭 하나는 빠트리게 되고, 그것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외출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사실 여유 있게 준비한다고 해서 미뤄지는 시간은 고작 10여분 정도밖에 안될 것인데, 나는 늘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이 빠듯하게 어떤 일을 무리해서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레디, 셋, 고' 


그 누구도 출발 신호탄을 울리는 사람도, 같이 뛰려고 준비하고 있는 선수도 없는데, 스스로 만든 신호탄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뛰어나갈 궁리만 하는 내가 있다. 




서두르다 보면 혹은 시간에 쫓기다 보면 중요한 것을 잊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판단 미스를 한다. 오래전,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다닐 만큼 어린 아기였던 시절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여 김포 공항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우리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지하철을 탔고 환승할 때, 이번 열차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가 앉아 있었던 유모차를 빠르게 밀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열차에 올라탔다. 그때, 겨우 성공했다는 안도의 웃음을 내쉬던 우리 부부를 보며 어르신 한분이 큰 소리로 나무라셨다. '간낫쟁이를 데리고 이렇게 위험하게 승차를 하면 어쩌냐고'. 촉박한 시간은 나의 판단을 흐려지게 만들었고, 비행기 시간에 맞추겠다는 덜 중요한 곳에 더 중요한 아이의 안전을 덮어버린 사건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인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어르신의 눈에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철없는 행동으로 보였을까?


물론 지금도 아는 만큼 실천이 잘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내 머릿속 계산으로 빠듯한 마감 시간을 정하고 그때까지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이 촉박해졌을 때 준비를 시작하고 결국 다 챙기지 못한 채로 후다닥 집을 나선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하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는 길에 물통에 물을 받아다 두고서는 유치원 차가 오는 시간이 촉박해지자 또 후다닥 달려 나가 나중에 아이들이 물을 찾을 때가 돼서야 물통을 집에 놓고 나온 것을 인지했다. 좀 더 여유롭게 준비를 하는 게 무엇이 그리 시간이 아깝다고 여기는 것인지 이건 비단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 갉아먹는 것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조급하면 될 일도 망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서두르지 마라'는 말씀을 내 삶의 큰 지표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는다. 반드시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란 것은 없다. 그보다는 오늘까지 해야 할 일이었다면 그전에 마무리를 하는 것이 맞고, 영업시간에 아슬아슬 맞춰서 도착할 것 같다면 그렇게 서두르기 전에 갔어야 하는 것이 맞다. 미리 해 두거나, 아니면 다음으로 넘기거나. 억지로 안될 일을 맞추기 위해 서두르는 게 아니라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이 옳은 선택임을 명심하겠다. 그리고 살아보니 그렇다. 그때는 그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것이 아니었어도 됐을 법한 일들이 참으로 많다. 그렇게 보니 '반드시', '꼭', '절대로' 라는 말들이 새삼 무섭게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건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간에 이것저것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생각하면서 충분히 몰입할 것. 그것이 반복되면 아마 마음의 여유가 생겨날 것도 같다. 그때가 되면 시간이 충분해지지 않을까? 




Photo by Ralfs Blumberg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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