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을 직시하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지발 목소리 좀 나긋나긋하게 낼 수 없나?"
어릴 적부터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는 바로 나의 목소리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장점이라고도 혹은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 목소리는 가수 했어도 좋았겠다 싶을 만큼 성량이 좋다. 교탁에서 '땡땡' 울리는 교탁 종소리보다 내 목소리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드세 보인다고 할까?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면 놀이터는 아이들과 엄마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을 대하는 엄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하다. 절대로 소리치는 법이 없고, 예쁜 말로 잘 달래준다. 물론 안 그런 분들도 종종 만날 때가 있지만 대다수는 유리 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이 어쩜 다들 목소리가 예쁘신지...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런 엄마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좀 더 나긋하게 이야기해보자' 하고 마음 먹지만 정작 첫째 아이가 친구와 노는 것에 정신이 빠져서 놀이터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기라도 할라치면 나도 모르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큰 목소리로 '박시완!'하고 소리치게 된다. 누가 알면 성악이라도 배운 줄 알겠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어색했던 것은 내 얼굴이 아닌 내 목소리 혹은 말투와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수경'아나운서와 같은 우아함을 기대했지만 실제 내 귀에 꽂히는 소리는 '이게 뭐야?'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일었다. 나는 대구 출신으로 전형적인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다. 보통 대학에 가서 많이들 고치던데 그러지 못했고, '쟤 또 중국 영어 한다'며 친구들이 놀리곤 했을 정도로 '억양'에서 오는 거센 느낌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그나마 표준어 사용이 익숙해졌을 무렵 남편을 만났지만 전형적인 '서울 사람'인 남편은 나의 큰 목소리와 무뚝뚝한 말투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낼 때면, 굉장히 놀라곤 하는데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인지 나는 말투나 목소리에 엄청 신경 쓰는 편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건 말투나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 말투가 아니라 내 말투에 담긴 나의 성격과 가치관이었다.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 대학 동기들 모임에서 1박 2일로 송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제는 가족모임이 돼서 자연스럽게 아이나 남편을 대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내 친구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은 어린이집 엄마들처럼 한결같이 큰 소리 내는 법이 없고 나긋나긋하다는 것이다.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 봐도 그들은 항상 그러한 모습이었다. (물론 전형적인 나를 제외하고 모두 수도권 출신이기 때문에 유난히 내가 튀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원하는 상냥함을 가진 친구 한 명이 있다. 외모가 빼어나게 예쁜 미인은 아니지만 몸에 밴 태도와 말투가 매력적인 친구이다. 그 친구와 5분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호감을 느낄 정도라서 대학시절 내 멋대로 '5분만 말해봐'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우선 여유롭다. 물론 아이들이 혼자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탓도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는 법이 없다. 나 역시 노력하는 편이지만 첫째 아이가 둘째를 때리는 것을 본다거나, 킥보드를 타고 가면서 앞을 안 본다거나 하는 위급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게 된다. 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말이다. 그날도 시완이가 여러 개의 날리기 장난감 중에서 유독 큰 것을 하겠다고 졸라대던 상황이었다. 큰 것은 손이 작은 둘째 아이가 했으면 싶어서 둘째를 쥐어주었는데, 그걸 본 첫째 아이가 냉큼 뺏어 들어서는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장난감을 빼앗긴 둘째는 울기 시작했고 게다가 울면서 넘어지는 통에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내 딴에는 아이를 설득하려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도했다.
"시완아, 이건 크니까 아기 주는 게 어때? 아기는 손이 작아서 작은 걸로 하면 잘 잡을 수가 없거든. 시완이랑 바꾸는 게 어떨까?"
"싫어. 이거 하고 싶단 말이야."
"너 때문에 아기가 넘어졌는데 어떡할 거야?"
제 고집을 꺾지 않는 첫째에게 결국 화가 나서 아이를 비난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당연히 본인 역시 잘못을 알았을 텐데 나까지 그것을 강조하자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걸 본 친구가 상황을 수습하고자 얼른 달려왔다.
"시완이가 이거 하고 싶었어? 그럼 하면 되지. 이모가 하나 더 있나 찾아볼게. 괜찮아, 괜찮아"
그러고는 어찌어찌 하나 더 있는 것을 찾아서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는 받아 든 것을 가지고 내 품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는 친구가 데려가 안아주고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둘째를 잘 데리고 놀아주는 친구에게 고마웠다. 상냥한 말투와 목소리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가 갑자기 왜 이럴까를 생각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침착하게 장난감이 더 있나 없나를 찾아보고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또 반성을 하게 됐다. 물론 친구가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입장이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 친구의 평소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싶었다. 내가 친구를 봐온 15여 년의 시간 동안 친구의 모습은 늘 한결같았다. 자기 기분을 잘 조절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침착함이 늘 부러웠는데, 엄마가 돼서도 여전한 그 모습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융통성 없는 내 성격이 담겨 있었다.
나의 방식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리타분한 영감 같다.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다면 일단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지적하고 그다음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는다. 즉 내 의견을 내 논리대로 납득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다르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나중에 하거나 거의 하지 않는다. (특히 비난의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에 상냥한 목소리와 말투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괜찮다'라고 말해준다. 친구가 늘 많이 하는 말은 "에이, 뭘 그런 걸 거지고 그래. 괜찮아"이다. 그리고 아이를 대하는 친구의 표정에는 항상 웃음이 서려있다. 늘 어떤 상황에서든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 서두르지 않고, 아이를 탓하지 않는 모습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역시나 아이를 안고서도 훈계하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농담 한 마디를 건넸다.
"어디 군대 갔다 왔냐? 으이구, 괜찮아."
그렇다. 그녀는 상냥함에 유머까지 갖추고 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다 갖추고 있는 나의 친구. 언제쯤 나도 그런 모습이 될까 고민하지만 못돼 먹은 고집은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 남편이 한 번씩, '넌 너무 과해'라고 말하곤 하는데, 나 역시 인정한다. 난 좀 과하다. 그래서 좀 덜 진지해지고 가벼워지고 싶다. 무거운 것을 무겁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유머를 장착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내 안에 무거움을 좀 벗어버리고 아이들에게 '희희낙락' 웃어주고만 싶은데, 생각과는 달리 늘 '일자눈썹'의 엄마가 돼버리고 마는 내 모습에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게 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걸까?
내 무뚝뚝한 말투와 부드럽지 못한 목소리에는 뭐든 융통성 없이 곧이 곧대로만 하려는 습성과 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하는 내 성격이 담겨 있었다. 가령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왔을 때,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주자 다짐하지만, 정작 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오면 멋쩍은 듯 뱉어내는 '잘 다녀왔어?'라는 말과 괜한 남사스러움에 꽁무니를 빼는 내 모습만 있을 뿐이다. 비단 집에서 뿐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한 번식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도 아이들 앞이라는 이유로 참는 경우가 많았다. 좀 웃으면 어때서 말이다. 애들이랑 농담도 하면서 재밌게 보낸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스스로를 옭아 맺던 것일까?
나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
내 안에 유머를 장착하고 좀 우아하고 부드럽게 말하려면 어떡해야 할지 또다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김창옥 교수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됐다. '감정표현'에 관한 강연이었는데 나와 똑같은 고민을 가진 질문자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이미 익숙해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는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다.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바람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원래부터 무뚝뚝한 사람이니 그런 나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의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진다면 나 역시 그런 표현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저 타고난 것이라 여기고, 자책만 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성격 급하고 잘 흥분하는 내가 갑자기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며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먼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나는 늘 내 모습이 너무 억척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처럼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갖고 싶다면 일단 마음가짐부터 달리 먹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이 필요했다. 진지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용기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처럼 그저 남과 비교하고 '열등감'만을 느끼고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먼저 자신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맞서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물론 나를 마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런 마음을 가지니 그래도 한결 마음은 편해졌다.
'그래 진지하면 좀 어때. 그게 또 내 매력이지.'
억지로 고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고 급하게 흥분하는 것을 한 템포 늦춰봐야겠다. 나를 직시하고, 조금씩이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겠다. 내면의 목소리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난 다음 한 발 늦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템포 늦게 말한다고 해서 큰일 나지는 않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 나를 보며 '어머, 어쩜 저리 말투가 예뻐.'라고 생각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서두르지 말고 내 마음속 소리에 천천히 귀를 기울여 보자. 무뚝뚝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부끄러운 마음을 들여다보면 상냥하게 웃음 짓고 있는 내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유머까지 창작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거기까지는 너무 큰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결론은 '나도 상냥한 유진씨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표지 사진 : Photo by Marc Schaef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