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많은 영화를 봤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배우에게 빠지게 되면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시작된 나의 영화 사랑은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영화 기자, 혹은 영화 평론가를 꿈꾸기도 했을 만큼 열심히 보고 간단한 리뷰를 기록하기도 했다.(컴퓨터로 해 두었으면 좋았을 걸 싶다.) 그랬던 나의 영화 사랑은 어느 순간 잠잠해진 것 같다. 좋아하는 배우, 감독의 영화가 개봉되면 열심히 찾아보던 열정은 어느덧 드라마와 웹툰으로 전이되었다.
영화 좀 본다고 생각했던 소싯적, 예술 영화도 많이 봤다. 보다가 잠든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하정우라는 배우는 한창 내가 스스로 영화인이라고 여기던 시절, <두 번째 사랑>이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서 알게 되었다. 사실 그 이후로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가 아니라서 보지 않은 것들이 더 많지만 그 영화 한 편으로도 하정우의 팬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내 친구도 영화를 좋아했던지라 우리 둘은 열심히 빠져서 영화를 봤으나 건너 자리에 앉았던 여자 두 명이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을 방해할 만큼 불평하면서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정우가 촌스럽다나 뭐라나. 심지어 연기를 너무 못한다는 말을 하는데, 도대체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나는 속으로 '두고 봐라 곧 뜯다'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이 예언이나 된 듯 하정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국민 배우가 됐다.
그런 배우가 책을 냈단다. 냉큼 사다 보고 싶었지만 사실 요즘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식은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신청한 독서모임 지정 도서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구입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 '서울국제도서전'에 가 볼 일이 생겼다. 문학동네 부스는 역시 대형 출판사만큼이나 화려하게 차려져 있었고, 그 속에서 베스트셀러 란에서 하정우의 책을 냉큼 집어 들었다. 도서전 기념 10% 할인에다 입장권에 붙어있는 할인권으로 그야말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구입했다.
책을 읽으면서 하정우 씨가 마치 오디오북으로 말하는 듯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발이 300미리 나 된다는 말에 '거인인가'라는 생각을 했고, fitbit이라는 시계를 구입했다.(생일 기념 엄마 찬스!) 내가 신혼여행으로 떠났던 하와이가 하정우에게는 걷기의 지상낙원이라고 하니 새삼 하와이의 풍경을 떠올리게 됐다. 혹시 내가 신혼여행에 갔을 때 하정우도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해봤다. 남편과 내가 렌터카를 타고 다녔던 그 길을 하정우 씨는 걸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걷게 하는 것일까?
하와이에서 10만 보를 걸었다는 대목에서도 참 이상하다 싶었다. 얼마 전 <마녀체력> 이영미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와서 인지 자연스럽게 '왜 이토록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점(死點)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그 희열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까? 나는 아직 경험을 못해봤다는 생각에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졌다.
사실 대학생 시절 유럽 여행을 하며 많이 걸어 보았다. 혼자서 떠난 스페인에서도 웬만하면 걸어서 다녔다. 하지만 나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걸었다는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때, 수영 선수반에서 하루에 2-3km씩 매일 운동하던 적이 있었다. 레인을 다 돌고 나면 물에서 땀이 난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너무 어릴 때라 그런지 사점을 지났다고 하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근래에 달리기를 하면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해본다. 5킬로를 뛴다는 목표로 뛰기 시작하면 2킬로도 채 못 뛰어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막상 5킬로가 다가오는 순간이면 더 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사점이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그저 짐작해 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걷는 사람, 하정우> p.118
배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한 문장이라 생각했다. ‘신데렐라의 비밀’이라 붙여진 이 꼭지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나의 삶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문장을 만나게 되니 더욱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생각이 바탕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늘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사람에게는 혼자만의 시간 혹은 어딘가에 몰두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일 외의 ‘어떤 것’이다. 하정우 씨에게는 걷기나 그림 그리는 것이 그것일 것이고, 책 읽기, 명상, 운동, 글쓰기, 악기 연주 등 뭐가 되든 간에 오롯이 자기 생각과 대면할 수 있는 나만의 '어떤 것'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생각했다.
현재의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롯이 혼자서 글쓰기를 하며 나를 마주하는 경험을 한다. 예전에는 생각이 많은 내가 싫었는데, 요즘은 그 쓸데없는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작은 탈출구를 찾았다는 느낌이 든다.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으로 그저 한다는 것이, 특별할 건 없지만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훌륭한 도구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인간 하정우가 너무 멋있었고, 부러웠다. 자기의 삶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모습이 훌륭해 보였다. 인생의 선배로서 담백하게 전하는 메시지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 될 것이라고. <걷는 사람, 하정우> p.231
결국 책에서 발견한 것은 나를 위로하는 말 한마디였다. 괜찮다고. 지금 하는 일들이 잘못되지 않았으니 그저 나아가면 된다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인생의 주인은 오롯이 '나'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배웠다. 요즘 '온전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가진 책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무심결에 집어 든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가 비슷하니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답게 산다'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것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지 않게, 하지만 진지하게 해야겠다 다짐한다.
가벼이 읽기 시작한 책은 말미로 갈수록 묵직한 그의 음성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듯, 적잖은 충격을 준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메시지에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지금 누군가와 비교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닐까? 누구와의 비교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저 고통을 견디는 것이 노력하고 있는 뜻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기억해야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뭔가 큰 돌이 내 가슴에 얹힌 것 같다. 그저 읽고 넘겨버릴 책이 아니라는 것은 초장부터 알았지만 막상 다 읽고 나니 왠지 모르게 무거워진다. 하지만 신나게 집밥 메뉴를 소개하던 부분이 떠올라 다시 또 미소가 지어진다. 결국 인생이란 열심히 땀 흘리고 난 뒤 맛난 음식으로 배를 채울 때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안도감 혹은 평안함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한 끼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혹은 잘 먹었다고 툭툭 배를 두드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값진 땀일 것이다. 내 인생이 '값진 땀'을 흘리면서 사는 삶이기를 기도한다. 그의 말처럼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나 역시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 p.291
그러니 건강하게, 열심히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진실하게 다가왔다.
결론은 하정우 씨가 더 좋아졌다는 것! 그의 영화도 영화지만 앞으로 나올 그리 전시회와 책들이 더 기대가 된다.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멋진 예술가로서, 앞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전달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좋은 삶과 좋은 예술은 공존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에 깊이 공감하며, <걷는 사람, 하정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