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엄마가 되기 위한 공부
코엑스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내리려고 카드를 찍으려는데 보니 미터기가 꺼져있더랬다. 택시 아저씨도 깜짝 놀라신 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내리라고 하셨다. 나는 그냥 내리기는 뭐해서 '오천 원 찍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저씨는 나를 힐끗 보시더니 카드 결제 기계를 만지셨다. 고맙다고 말을 하시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웬걸, 8천 원을 찍고 계시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8천 원이요?'라고 되물었고, 아저씨는 다시 오천 원을 찍으셨다. 결제를 하고 내리긴 했지만 선의를 베풀려고 했다가 되려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어 개운치가 않았다. 자주 오가던 거리기 때문에 아무리 택시 기본요금이 상승했다고 한들 8천 원까지 나오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냥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택시 아저씨는 혹시 본인이 미터기 안 찍은 걸 내가 알고서 모른 체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그날 아저씨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나의 짐작일 뿐이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오해는 결국 풀리지 못했고 기분이 상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 사건을 통해 사람마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의중을 읽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것은 눈치 혹은 상황판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는 유독 눈치 있는 사람을 '센스'라고 여기며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센스를 발휘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는 옛날부터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그저 입을 다무는 스타일이다.) 듣는 것 또한 취약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부터도 (부부간 혹은 부모 자식 간) 서로의 입장을 내 맘처럼 이해하며 알아주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아이의 입장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차라리 혼자 살 걸 그랬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p.115에서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알고 헤아리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가 그간 아이들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가장한 나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첫째와 둘째 아이 모두가 요즘 간식거리에 빠져서 자꾸 밥 대신에 군것질 거리들을 찾는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달콤한 간식들이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건강한 먹거리이다. 그래서 견과류 같은 것들로 대체하려고 하지만 달콤한 젤리나 사탕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 돼버린다. 한 번씩 완강히 주는 것을 거부하는 나를 보며 손자들이 가여워 보이는지 엄마나 시어머니께서는 그냥 주라고 한 마디 하시는데, 여전히 뭐가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육아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고민은 비단 먹거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첫째 아이가 TV를 틀어달라고 할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 단편적으로 우리 사촌들을 예로 들어보면 그들은 엄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TV 보는 것을 제한당한 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늘 TV가 틀어져있던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고, 방학 때면 놀러 와서 몇 날 며칠씩 묵다가 가곤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들은 학창 시절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물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단순히 성적만을 놓고 본다면 TV를 보여주는 것의 여부가 크게 상관없는 것처럼 보여 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이렇게 원하는데, 보여줘도 될까? 아니야 그냥 원천 차단하는 게 맞아. 매번 고민이다. (벌써부터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다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이들을 보여주기 위해 빌린 <난 할 수 있어>라는 그림책인데, 빌려온 지 일주일이 넘도록 펼치지도 않고 있던 책이다. 웬일인지 오늘은 여유롭게 시간이 남아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을 읽었다. 거기에 거짓말처럼 TV 보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었다. 책에서는 아이의 입장을 대변한다. TV를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여준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리고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3가지 방법이 나온다. 첫 번째는 내가 직접 만들면 되지, 두 번째는 TV 속 주인공이 되어볼까?, 세 번째는 친구들 앞에서 인형극 놀이를 해보자 이다. 이걸 아이에게 읽어주고 뭐 할까를 선택했는데 아이가 두 번째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떤 주인공이 되어볼까 했더니 토마스 기차가 되어보자고 하길래 눈에 보이는 커튼 묶는 끈을 빼다가 양 손에 잡고서 기차놀이를 했다. 둘째는 첫째와 나 사이에 껴서 같이 놀이를 하는데 '칙칙폭폭'하는 몇 마디와 함께 깔깔대며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새 TV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듯 보였다.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게 소통이구나 싶었다. TV를 보면 안 되는 100가지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소통이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잔소리였음을 기차놀이를 통해 깨달았다. 안된다는 말 대신에 다른 방법을 제시하여 아이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니 나도 아이에게도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소통을 경험한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대사 중에 현실에서 적용될 만큼 그럴듯한 대사를 묻는다면 '내가 언제 그런 거 해 달라고 했어?'라는 말을 꼽을 거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커서 나에게 이렇게 따진다면 나는 정말 뭐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주려고 했던 것은 사랑이었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정말 아찔 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이 조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내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상담을 깊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로서 엄마로서 아이들의 상담가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한창 임용 고사 공부 때문에 교육학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시험 때문에 외우기는 했지만 이럴 때 떠오른 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데, 상담의 원리 중에 <자기 결정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상담 과정에서 상담자는 '자기가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려는 내담자의 결정을 존중하며, 그 같은 욕구를 결정할 수 있는 잠재적 힘 즉, 자기 결정의 원리를 자극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심리학 by 정동화, 서현 사)
결국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경험을 첫째 아이 밥을 먹일 때마다 하게 되는데, 안 씹고 물고 있는 첫째 아이와 씨름하면서 깨달은 것은 바로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아무리 꼬드기고, 협박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봤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본인의 선택과 의지였다. 자기가 스스로 씹어야겠다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내가 뭐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씹고 삼킨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쪽쪽 빨면서 입에 물고만 있는다. 그런데 입에 물고 있는 것 역시도 먹기가 싫다는 자기 의지의 반영이었다. 단지 엄마가 무서우니 입에 집어넣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아이와의 씨름 끝에 알게 되었다.
강요는 답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협박해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가 없다. 버츄 프로젝트 대표 선생님인 권영애 선생님은 사랑만이 답이라고 하시는데, 그 사랑을 어떻게 줄 것인지 잘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부모들이 고민한다.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나 역시 매일 그런 고민 속에 있다.
사탕 하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어쩌다 한 번씩 밥을 잘 먹은 아이를 보면 그게 대견해 보여 아이가 좋아하는 사탕 하나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씩 주게 되면 또 하나 더 달라고 바라는 아이가 있다. 거기서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이걸 더 줘도 되는 건지 그만 주어야 하는 건지. 우리 올케는 아이들에게 그냥 마음껏 과자를 준다. 한 번 질리도록 먹어봐야지 다음번에 안 찾는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아이가 원하는 사탕을 주는 것이 맞는 것인데, 그건 또 안 되는 지라 결국 아이와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일단은 말로 설득하는 것이고 다른 흥미로운 것들을 제시하는 것, 결국 엄마가 좀 피곤해지는 일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내가 바라는 것은 엄마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저 내가 정한 대로, 내 생각대로 그들의 요구를 억압하고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은 알지만 위해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전적으로 그렇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이 아주 조금이나마 알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비록 택시 아저씨와는 소통하지 못했지만 아이들과는 소통하는 부모이고 싶다. 서로 대화하고 다른 대안을 찾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가 결정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스스로가 질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좀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하겠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엄마가 자기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육아도 살림도 그리고 글쓰기도...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표지 사진 : Photo by Joanna Kosinsk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