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주제로 한 7편의 단편이 담긴 단편집. 두 단짝친구 사이에 끼어든 한 남자,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성인이 된 자식, 권태기가 온 커플, 축제가 취소된 줄도 모르고 출장을 온 무명 밴드 등등. 일반적으로 여행하면 떠오르는 밝고 활기찬 이미지와 다르게,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과 마주친 주인공들에게 우울하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여행은 보편적으로 힐링, 재충전, 영감과 같이 밝고 생기 있는 단어들과 연결된다. SNS에 올라오는 여행 사진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뉘앙스를 띠고, 나이가 많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하는 조언에는 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여행에 긍정적인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행은 별다른 감흥이 없기도, 또 어떤 여행은 후회스러운 감정만 남기기도 한다. 대학교 2학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좋았는데, 딱 여행용인 거 같아." 친구들은 여행을 다녀와서, 심지어 유럽에 다녀와서 이런 후기를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는 꽤 놀랐다. 다들 여행지에서 행복에 겨워 떠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걸까? 모든 여행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떠나기 싫어질 정도로 좋았던 여행도 많았다. 하지만 첫 유럽 여행에서의 감정은 그랬다. 혼자 비행기를 탔던 두려움, 길거리에서 당했던 인종차별, 여행 내내 달고 살았던 목감기, 돌아오는 날 있었던 지하철 파업까지. 마냥 행복으로만 채울 수는 없었던 기억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거리 풍경, 한국으로 수입해오고 싶었던 날씨, 맛있는 납작 복숭아, 푸짐한 식당 인심처럼 좋았던 기억들도 있기는 했다. 낯선 장소에서 겪는 사건들은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사건들만 기억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여행의 단면만이 부각되는 것 같다.
그런 파편적인 기록들 사이의 빈틈을 메꾸려는 듯, 유디트 헤르만이 쓴 7편의 단편들은 아마 많은 사람이 여행에서 느꼈을 긍정과 부정의 감정들을 폭넓게 기록한다. 두 친구 사이에 낀 남자, 권태기가 온 커플,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다 자란 아이, 감정의 타이밍이 어긋난 남녀까지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은 대체로 냉랭한 편이다. 하지만 「단지 유령일 뿐」의 펠릭스와 엘렌은 버디를 만난 후 아이를 낳고,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의 두 음악가는 실망으로 시작했던 여행을 행복하게 끝맺는다. 신기하게도 이 행복의 장면들은 아주 짧게 언급된 구절인데도 불구하고 건조했던 소설 전체에 대한 인상을 좋은 기억으로 바꾸어 준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읽고 이해하느라 괴로운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고작 몇 문장으로 된 두 장면이 괴로웠던 시간을 달콤함을 위한 인내의 시간으로 바꾸어주는 것을 느껴보니,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좋았던 기억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불편했던 기억도 좋게 기억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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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문장: 벌써 그와 나 사이의 모든 것은 기억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p.224 아래에서 4번째 줄)
선정 이유: 주어진 묘사만을 읽고 상황을 추측해야 하는 꽤 어려운 소설 속에서,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두 남녀의 상황을 가장 명확하게 은유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보면서 현재의 상대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그를 통해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선정 이유: 실망으로 시작한 여행이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 구성 덕분에 읽는 내내 쌀쌀함이 느껴졌던 소설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따뜻하게 데워졌고, 화자의 친절하면서도 무심한 성격이 부정적으로 읽을 수도 있었던 상황들마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