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im Jung Nov 03. 2021

책과 전시와 연극

아르코미술관 《그 가운데 땅: 시간이 펼쳐져 땅이 되다》

전시 기간: 21.04.22-21.06.13

관람일: 21.06.11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그 가운데 땅: 시간이 펼쳐져 땅이 되다》는 주제와 형식 면에서 모두 흥미로웠던, 그렇지만 조금 어려운 전시였다. 우선 이 전시는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영국의 판타지 소설 작가 J.R.R. 톨킨의 저서에 있는 ‘시간이 펼쳐져 땅이 되다’라는 문구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을 공간으로 풀어낸다는 의미의 이 문구가 전시의 주제이자 형식이다. 전시는 몇만 년에 걸친 톨킨 신화를 인류의 역사에 비유하고, 각 작품을 연극의 배우처럼 설정했다. 결국 이 전시는 역사를 연기한 현대미술의 연극무대여서, 마치 내가 이동하면서 보는 연극을 관람하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각 챕터의 제목은 톨킨의 저서 ‘History of Middle Earth’로부터 가져온 것이 맞지만 작품들은 그와는 상관없는 현대미술 작품이다. 각 작품을 연극의 줄거리로 연결 지어 풀자면 이렇다.


     1. 가운데 땅의 역사(톨킨의 세계관을 총망라하는 12권으로 구성된 역사서의 제목)

도시의 모습을 담은 드로잉을 통해 세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1부 전경

     2. 잃어버린 이야기(『가운데 땅의 역사』 중 1, 2권의 제목으로 세계관의 신화를 서술)

추상 풍경화를 통해 단어의 뜻 그대로 명확하지 않은 현실을 표현하고, 사회 비판적 주제의 영상을 통해 인종과 성별 등 수면 아래에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한다.

2부 전경

     과거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전시장 1층에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2막과 3막을 이어주는 작품이 있는데, 잃어버린 역사로 인한 불안감을 표현한 영상을 계단 전체에 맵핑하고, 그 위에는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발밑에 두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조각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3막을 연결하는 계단

     3. 가운데 땅의 형성(『가운데 땅의 역사』 중 4권의 제목으로 대륙의 지리적 형성 과정을 서술)

과거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고, 자연 요소들을 담은 드로잉을 통해 물리적 세계가 만들어졌음을 표현한다.

3부 전경

     4. 잃어버린 길: 어둠의 귀환(『가운데 땅의 역사』 중 5, 6권의 제목으로 악으로부터 저항한 사건들을 서술)

여러 개인을 형상화한 조각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길’을 표현하지만, 그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을 통해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아감을 암시한다.

4부 전경

     5. 가운데 땅의 사람들(『가운데 땅의 역사』 중 마지막 12권의 제목으로, 중간계의 각 종족에 대해 서술)

닻을 소재로 한 사진을 통해 현재 세계를 탐험하고, 사회적 사건을 재구성하는 영상을 통해 역사를 다시 쓰고, 의미를 담지 않은 드로잉을 통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다. 마지막에는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연상하게 하는 설치물을 통해 사회의 모습을 노래와 전설로 후대에 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전시 첫 작품의 또 다른 연작을 설치해 현재 또한 과거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5부 전경

     그리고 현 세계에 대한 톨킨의 예찬으로 전시를 마무리한다.

톨킨의 말

     이 연극 전시는 이렇듯 연극을 볼 때 앞뒤 서사를 생각하며 보는 것처럼 감상해야 각 작품이 맡은 역할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리플렛 역시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는 점이다. 전시장에는 2개의 리플렛이 놓여있다. 하나는 공식 리플렛이고 하나는 동선과 레이블만 적힌 지도다. 그런데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어떤 두 작가의 작품은 연극에서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식 리플렛에서 설명이 빠져 있다. 빠진 작업들은 주로 연극의 분위기를 암시하거나 연극을 감상하는 관객의 모습을 작품화한 것인데, 아마 이 현대미술 서사시에서 중요한 사건을 맡은 작품은 공식적인 자료로 남기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비공식 자료로 남겨 실제로 역사는 권력자에 의해 적힌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식 자료에 표기되지 않은 작품들



연극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볼 때 사람마다 감상이 다른 것처럼 이번 전시 역시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시나리오의 연극을 감상했을 것이다. 특히나 연극의 배우가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석이 열려있는 현대미술이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조금 까다로웠지만,《그 가운데 땅: 시간이 펼쳐져 땅이 되다》는 '미술'을 통해 '문학'을 '연극'으로 풀어내 세 장르 간의 융합 방식을 탐구한 실험적인 전시였기에 전시를 해석하는 내내 그 세계를 탐험하는 것처럼 설렜다.

전시 마지막 장면




전시 공식 사이트

작가의 이전글 공생에 관한 정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