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분명하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줄리언 반스는 꽤 집요하게 이 문제를 파고든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선 아마추어 학자가 등장해 플로베르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가 플로베르 연구 끝에 도달한 진실은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세 마리의 앵무새 중 하나가 플로베르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부였다. 역사적 진실이란 건 잡으려고 애써도 도망치는 기름칠한 돼지라고도 했다. 줄리언 반스는 철저한 회의주의자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에선 좀 더 직접적으로 ‘역사는 실내 장식업자의 롤러로 물감을 칠한 그림과 비슷’하다며 회의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낸다. 반스에게 역사는 또 다른 형태의 허구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P.34)이란 멋진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반스는 자신의 집요한 회의에도 불안했는지, 역사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논증을 개인의 삶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우린 자기 인생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무슨 남의 인생을 거론하며 나아가 역사의 진실을 어찌 거론한단 말인가. 뭐 대략 이런 의미다. 보다 강력한 회의주의자의 자세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자기 인생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한 남자, 앤서니 웹스터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앤서니 웹스터는 신중한 자세로 과거의 사실을 점검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P.76)
소설은 인생의 두 시절을 다룬다. 하나는 젊은 시절.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던 시기. 10대 혹은 20대 땐 책에서 배운 이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론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세상의 이치는 선명하고 단순하다. 때문에 이 시기엔 두려운 게 없다. 세상에 대한 진리를 확보했다는 우월감과 자신감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젊음의 지적 허세가 개입한다. 젊음의 뜨거움엔 회의주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란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던 웹스터도 그 시절을 ‘허세 덩어리’로 규정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달리 청춘이겠는가.’(P.23) 청춘의 단언은 죄가 아니다.
문제는 노년에 도달했을 때다. 웹스터의 말년. 그는 기억 앞에 겸손했음에도,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내용이 완전히 잘못됐음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 앞에서 인정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소설의 반전과 연관되어 있으니 생략한다.) 기억력은 얼마나 절묘하게 자신의 인생을 윤색하고 있던가. 이제 그는 기억이란 토대 위에 세운 자신의 모든 결정과 판단을 거둬들여야 한다. 특히 자신이 비난해왔던, 40년 만에 만난 전 여자 친구 베로니카에게 사죄해야 한다. 웹스터는 이 과정을 ‘회한’이라고 표현하는데, 단순한 슬픔과는 다른,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 붙어 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사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베로니카에게 그런 편지를 쓴 데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P.172-173)
나이 들수록 우리가 얻어야 하는 지혜는, 회한의 감정을 최대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줄리언 반스식의 철저한 회의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조차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자연스럽게 주장이 줄어들고, 판단을 내리는 데 신중해져야 맞다. 그게 이상적인 노인의 지혜다. 회의주의적 지혜를 얻게 되는 건 결코 나이 듦에 따른 겸손함의 발로 혹은 인격적 성숙의 결과가 아니다. 그저 섣부른 판단과 주장이 가져오게 될 회한의 고통을 최대한 피하기 위한 실리적 결정이다. 웹스터는 한다고 노력했지만, 회한의 고통을 피하지 못했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중략)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P.242-243)
그런데 어찌 된 게, 주변엔 나이 든 사람일수록 주장에 당당하고, 확신에 주저함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확신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이마저도 모자라 가르치려 든다. 어째서 이들은 웹스터가 깨달은 회한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물론 아프리카 독재자의 아들처럼, 주변 환경 여건이 회한을 느끼기엔 적합하지 않은, 그러니까 평생을 왕자처럼 자라온 꼰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보단 기억력의 윤색 작업 탓이 클 거다. 회한을 느낄 여지가 생기기 전, 기억력이 알아서 유리하게 사실을 뒤바꿔 놓는다면, 그들의 당당함이 이해가 간다. 이렇게 되면 줄리언 반스의 집요함이 옳았다. 웹스터가 인생의 결말 앞에서 중얼거렸던 것처럼.
앞으로도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을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지금 알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