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새해는 결심이 쉬워서 좋다. 지키지 못할 계획이나 목표를 세워도 용서 받는 분위기랄까. 마구잡이 결심은 새해의 특권이다. 평소 결심을 즐기는 내가 새해를 그냥 넘길 리 없다. 특히 매년 새해면 빠지지 않는 허황된 결심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소설 쓰기’다. 결심을 하면서도 못 지킬 걸 알지만, 이렇게 매번 결심 하다보면 언젠간 뭐라도 쓰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서도 반복하는 행위가 또 하나 있으니, 그건 ‘소설 쓰기와 관련된 책을 사는 일’이다.
보통 이런 책의 내용은 비슷비슷해서 사놓고 잘 읽지도 않는데, <유혹하는 글쓰기>는 저자가 스티븐 킹이라 한 번 읽어봤다. 소설가로 등단한 장모님께 ‘이런 책 읽는 시간에 뭐라도 하나 써봐’란 핀잔을 들으면서도, 내가 반복적으로 글쓰기 책을 구입하는 이유에 대해 스티븐 킹은 이렇게 대신 변명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창작 교실에서만큼은 자기만의 꿈나라에 틀어박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꿈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과연 남의 허락이나 출입증이 정말 필요할까? 누가 여러분에게 ‘작가’란 종이 명찰을 달아주어야만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믿겠는가? 제발 아니기를 바란다. (P.291)
소설 쓰기와 관련된 책을 구입하는 건 나만의 창작 교실이나 세미나를 여는 것이며, 그 안에선 꿈나라에 빠져 있는 게 용인되는 느낌을 받는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비슷한데 좀 더 실용적인 정보가 많다. 물론 책을 많이 읽어라, 어휘력을 늘려라, 나아가선 글은 짧게 쓰고 수식어는 배제하라는 식의, 이미 너무 여러 번 들어 이젠 아무렇지 않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는 내용이 많다. 스티븐 킹도 알면서 썼겠지만, 그건 설명 듣는다고 나아지는 부분이 아니다. 소설 쓰기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창작론’ 챕터 역시, 마치 ‘보다 정확하게 삼 점 슛을 넣는 법’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크게 와 닿진 않는다. 한 번이라도 써봤어야지.
얻은 것도 물론 있다. 스티븐 킹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조언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소설가가 소설 속 세계를 A부터 Z까지 세세하게 설계하지 않는다는 사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소설 속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말했다. 자기도 쓰다보면 캐릭터가 완성된다는 의미다. 하루키는 인물이 작가의 손을 떠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면서 ‘어떤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소설가의 손을 잡고 그/그녀가 미처 예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장소로 이끌어주기도’한다고 말했다. 이건 뭐지. 겸손함을 가장한 잘난 체인가. 반신반의했다.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는 스티븐 킹의 말을 듣기 전까진.
스티븐 킹 역시 나 같은 독자의 의심을 예상하며, ‘안 믿어도 좋다, 다만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것만 믿어주면 된다고' 했다. 표현 방식만 달랐지 하루키가 했던 이야기와 거의 같다. 스티븐 킹의 얘길 좀 더 들어보자.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작가가 해야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렇게 발굴한 화석이 조가비처럼 작은 것일 수도 있다. 또 때로는 엄청난 갈비뼈와 빙긋 웃는 이빨들을 모두 갖춘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아주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단편 소설이든 천 페이지 분량의 대작이든 간에, 발굴 작업에 필요한 기술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P.200)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캐릭터가 손을 잡고 소설을 쓴다거나, 땅에 묻힌 이야기를 발굴한다는 설명은 소설 쓰기란 허황된 목표에 현실감을 입혀준다. 결국 소설 쓰기의 목표를 꿈나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창작’에 대한 부담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 기다리면, 캐릭터가 내 손을 잡고 끌고 간다거나, 티라노사우르스의 뼈를 발견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다.
퇴고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일단 초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부지런히 쓴다. 그리고 글을 묵혀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보름에서 한 달간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는 이 단계를 건축 현장의 ‘양생’이라고 했고, 스티븐 킹은 빵을 발효시키는 것에 비유했다. (스티븐 킹의 발효 기간은 6주다.) 양생 기간을 두면 뇌도 양생이 되어 좋다지만, 진짜 초고를 묵히는 이유는 따로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보다 남이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쉬운 법’ (P.262)이니까.
역시나 두 작가의 퇴고 강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의 부담감을 덜어준다. 백지에 뭔가를 쓰는 건 언제나 부담스럽지만, 이미 채워진 글을 빨간 펜으로 고치는 건 나름 즐겁기까지 하다. 물론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 퇴고의 의욕을 불태우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단 건 잘 알지만. 어찌됐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과 스티븐 킹의 책을 연달아 읽고 나니, 반복 되던 새해의 '소설 쓰기' 결심이 좀 덜 허황돼 보인다. 바로 여기에 실용서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비슷한 내용의 다이어트/운동 서적을 반복 구입하는 것처럼, 실용서의 구입은, 그걸 사서 읽던 안 읽던, 허황된 결심을 유지해주는 최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