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창백한 불꽃>,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聯句)로 이루어진 이 시는 총 네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프랜시스 셰이드(1898년 7월 5일 출생, 1959년 7월 21일 사망)가 생애 마지막 스무날 동안 미국 애팔라치아 지방 뉴와이의 자책에서 집필하였다.’(P.17)란 문장과 함께 시작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시 해설서 형식을 띄고 있지만, 논문은 아니다. ‘이 명확하고 분명한 비평 연구 자료를 비비 꼬고 뭉그러뜨려 기괴한 소설 비슷한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P.111)라고 대놓고 말했어도, 사실 <창백한 불꽃>은 독자와의 두뇌싸움을 시도하는 나보코프 특유의 기괴한 소설이다.
시 <창백한 불꽃>(나보코프가 창작한 허구의 시다)의 해설서를 쓴 인물은 찰스 킨보트 교수다. 그는 자신이 단 주석에 불필요한 추가 해석, 혹은 오독이 발생할까 걱정하는 결벽주의자다. ‘참된 예술은 일반인의 눈으로 지각되는 보통의 '사실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것만의 특별한 사실성을 창조하는 법’(P.165)이라며 일반인 독자의 눈을 경계했으며, ‘나는 여러분이 자신이 읽는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읽을 수 있다는 그 기적에도 놀라서 숨이 막히길 바란다’(P.357)며 간접적으로 자신이 쓴 텍스트에만 집중해주길 부탁했다. 실제로 나보코프 역시 <롤리타>를 ‘늙은 유럽이 젊은 미국을 농락하는 이야기’로 규정한 평론가의 해석에 발끈하여, 출간 후 시간이 흐른 뒤에 작가의 말을 추가하기도 했다. 제발 쓸데없는 해석 혹은 주제를 찾으려는 강박 따윈 갖지 말라는 메시지였는데, 이는 킨보트 교수의 목소리를 통해 이어진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막아도 젊은이가 코를 파거나 항상 단춧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을 때..... 정신분석학 교사는 젊은이의 환상 속에서 육욕은 한계가 없음을 안다.
(오스카어 피터스 박사의 <정신분석 방법>, 1917, 뉴욕판, 79쪽에서 C교수가 인용함)
<빨간 두건 소녀>의 독일어판에서 작고 빨간 벨벳 두건은 월경을 상징한다.
(에리히 프롬의 <잊힌 언어>, 1951, 뉴욕판, 240쪽에서 C교수가 인용함)
저 어릿광대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걸 정말로 믿을까. (P.334-335)
하지만 소설에서 비실용적 자기 계발의 메시지를 뽑아내는 브런치 운영자의 욕망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미 텍스트는 완성됐으며, 이제 해석의 기회는 독자에게로 넘어왔다. 게다가 프로이트 주의자의 기계적 분석을 꾸짖던 킨보트 교수였지만, 정작 본인은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 이본(異本)을 들먹이며 존 셰이드가 쓴 999행의 시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킨보트는 자신의 시 해설이, 수면 아래 감쳐줘 있던 예술의 진실을 드러내 주는 행위라고 항변하지만, 사실 그는 새로운 창조, 그러니까 명확한 비평을 가장한 기괴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는 본인도 직접 인정한 사실이다.
단언컨대, 내 주석 없이 셰이드의 시만으로는 인간적인 사실성을 갖지 못한다. 저자가 무심코 배제한 의미심장한 시행이 상당히 생략된 그의 시(자전적인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종잡을 수 없고 말을 아끼고 있다) 같은 작품이 갖는 인간적인 사실성은 저자와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 (P.36)
마지막 문장을 살짝 변주해야겠다. ‘나의 친애하는 교수는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독자다.’ 그리하여 난 나보코프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교훈을 찾아 나섰다. 물론 쉽지 않다. 나보코프는 나 같은 독자를 차단하기 위해 겹겹의 안전장치를 해놨다. 우선 나보코프는 일반적인 소설 플롯을 완전히 해체해, 주석의 형태로 찢어놓았다. 전체 이야기를 조립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다양한 상징과 은유가 독자의 해석을 방해한다. 더 큰 문제는 화자인 찰스 킨보트의 상태. 심각한 피해망상이 의심된다. 본인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피해 도망 온 전설 속 왕국의 마지막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킨보트의 눈에 셰이드의 시는 사라진 자신의 조국, 젬블라의 영광을 되살려내기 위한 예술의 궁극이다.
어디까지가 팩트고, 어디까지가 망상인가. 나보코프가 짜 놓은 게임에 빠져들면, 소설의 교훈과 메시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력화된다. 학자들 역시 <창백한 불꽃>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연구서를 쏟아냈는데, 특히 2013년에 나온 르네 알라다예의 책은 ‘연구서지만, 서사구조의 미스터리를 일종의 탐정 추리 방식을 차용해 흥미진진하게 파헤치는’(P.411) 연구서라고 한다.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도 나보코프가 짜 놓은 게임의 법칙 안에서 순환 고리를 뱅뱅 돌고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무식한 독자는 킨보트의 피해망상에 집중하려 한다. 실제로 완벽주의자 나보코프는 ‘모든 플롯은 킨보트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단서를 소설 곳곳에 흘려놓았다.
그는 나를 계속 감시했고, 존 셰이드가 서거하자 곧바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를 등사판으로 인쇄해 배포했다.
영문학과의 몇몇 구성원은 고 존 셰이드가 남긴 시 원고 혹은 그 일부의 운명을 몹시 근심하는 바입니다. 다른 학과에 속해 있어 그것을 편집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알려진 인물의 수중에 원고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여기에서 어떤 법적 조치가, 운운. (P.240)
어떻게 하면 피해망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킨보트 교수는 본인을 쫓겨난 왕이라고 믿었다. 자신을 시해하기 위한 암살자가 다가온다고도 생각했다. 이처럼 망상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세상이 자신에 집중하여, 뭔가 계략을 짜고 있다는 생각, 즉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대해 불안을 증폭하는 게 망상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물론 하는 일마다 꼬이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음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긴 한다. 하지만, 세상은 내 존재에 하등 관심이 없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엑스트라다. 그것도 카메라에 한번 비치지 않는 엑스트라.
그럼에도. 우리는 킨보트처럼 망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왜? 나보코프가 극도로 경계했던, 하지만 킨보트 교수 역시 범하고 말았던 오류, 바로 해석의 욕망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엔 정교한 인과 논리가 필요하고, 이때 인간의 정보 수집 능력은 플롯에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한다. 그렇게 주석자 건 독자 건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때문에 작가가 쓴 텍스트는 해석에 굶주린 독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재창조될 수밖에 없다. 그 재창조의 욕망이 현실에선 피해망상을 만들어낸다. 결국 존재감 없는 자신의 지위를 명확히 인지해야만,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말한 ‘니 자신을 알라’를 실천해야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나의 교훈이다.
궁극적으로 교훈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마치 존 셰이드의 자전적 시를 ‘젬블라여 영원하라’로 해석해낸 킨보트의 해석만큼이나 터무니없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나마 킨보트의 해석은 흥미진진하기라도 했다. 킨보트 교수가 남겼던 조롱이 귓가에 맴도는 까닭이다. 합성 젤리 같은 두뇌.. 어쩌고 저쩌고.
내가 느끼는 바를 그들은 느끼지 못하고, 내가 보는 바를 그들은 보지 못하고, 또 그들은 그의 현전이라는 로망스에 온 신경을 쏟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당연시한다는 것을 알고 나의 경이감은 더 깊어졌다. 나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여기 그가 있다, 저것은 그의 머리다, 주변의 합성 젤리 같은 두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두뇌가 그 속에 차있다.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