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남한산성>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281)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란 문장에 응축되어 있는 상황을 김훈은 한 권의 소설로 풀어낸다. 청나라의 무자비한 침략 앞에서, 조선은 외통수 상황에 몰려있었다. ‘화(和)가 죽음이면 전(戰) 또한 죽음이다’(209)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항전을 논하는 김상현 사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인물은 영의정 김류였다. ‘싸우는 것과 웅크리고 버티는 것’(83)을 모두 담당해야 하는 김류는 신념보다 자신의 안위를 본능적으로 우선시하는, 소위 말하는 영혼 없는 고위직 공무원이다. 자기 보호에 탁월한 인물이다.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16)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는 모두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다’는 핵심을 감추기 위한 수사적 장식이다.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다’가 곧 김류의 소신이다. 이율배반적 상황에 몸을 맡기며, 그 상황의 모순에 분노하거나 대적하지 않은 채, 온갖 개인적인 곤란함을 회피해가는 게 김류의 방식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에 버티고 있던 조선의 조정처럼, 김류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버텨서 생존했다. <남한산성>엔 김류식 생존 방식, 아니 성공 방식이 꽤 디테일하게 묘사돼있다. 신념 없이 그저 버텨서 견디려는 현대인을 위한 업무 가이드랄까.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티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날을 맞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김류는 깊이 신음했다.’ (96)
김류는 화친의 길과 항전의 길을 모두 열어놓았다. 화친이 득세하면 화친파로, 항전이 이기면 항전파로 변신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영의정이란 자리 위에서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박쥐식 행보인데, 인용에서 알 수 있듯 쉬운 일이 아니다.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선택을 균형감 있게 선보여야 하는데, 이는 마치 자장면과 짬뽕을 논하는 자리에서 짬짜면을 이야기하면서도, 접시 한가운데가 갈라진 그릇을 피함으로써, 자신이 박쥐의 길을 걷고 있단 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는, 노회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김류는 일종의 실용주의 노선이다. 그에게 신념은 구차한 방해물에 불과하다.
김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짬짜면을 먹는 고난도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선택을 의미하며, 선택은 곧 신념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고위직이 결정을 완전히 피해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적당하게 균형적으로 결정을 내리되, 중요한 결정은 미뤄야 한다. 이런 식이다.
‘-싸우기를 극언한 신하들을 적에게 보내어 성을 나갈 길을 열어주시오.
-죄 없는 사대부를 적에게 내줄 수는 없다. 전하의 근심이 크시다.
-하오면 그들을 장수로 삼아 소인들과 함께 출전시켜주시오.
-사대부가 어찌 싸움의 일을 알겠느냐.
-이도 저도 아니면 어쩌자는 것이오. (336-337)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상황이 온다. 이때 김류가 사용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말의 알맹이를 현란한 포장으로 위장하기. 알아듣기 힘든 말을 그럴듯한 추상적 문구로 포장하고 또 포장하는 것이다. 명길과 상헌의 논쟁에서 김류가 취하는 방식이다.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315) 무슨 말인지는 말하는 김류 본인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 더 난처한 상황에서 김류가 쓰는 두 번째 방식. 동문서답이다. 아예 대놓고 헛소리를 하는 거다.
임금이 김류를 바라보았다. 김류는 감았던 눈을 뜨면서 임금의 시선을 받았다. 임금의 시선은 말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류가 말했다.
-칸이 왔다면 어쨌거나 성이 열릴 날이 가까이 온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날짜가 다가옴을 아뢴 것이옵니다.
임금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영상의 말은 나무랄 데가 없구나. (271)
화친과 항전의 선택 앞에서 김류는 ‘시간은 흐른다’라고 답했다. 오늘 다음은 내일이고, 아침 다음은 점심이라는 답변을 한 셈인데, 스스로 바보가 되는 수모를 무릅쓰고, 위기를 넘어간 것이다. 김류라고 임금의 지적이 비아냥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게 김류의 방식이다.
매사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할 수는 없다. 김류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하는 상황. 바로 보고할 때다. 보고는 자신의 행적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포장할 수 있는 그럴듯한 절차다. 보고서의 내용과 현실의 갭이 발생하는 이유다. 실제 소설에도 ‘한나절 싸움을 끝내고 성 안으로 들어온 초관들은 전과를 과장했고, 군장들은 더욱 부풀려서 묘당에 보고했다’ (133)고 나온다. 자신의 공을 부풀리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다. 동시에 적절한 타이밍의 보고는 상관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류의 보고는 용골대의 화포가 왕의 거처를 파괴하는 절박한 순간에도 이어진다. 시작은 병조판서의 보고였다.
-지금 터지는 화포는 홍이포라는 것이옵니다. 홍이포는 길이가 두 장 반에 무게는 삼천 근이고, 포탄은 수박만 한데, 곧게 오십 리를 날아가 표적을 맞춘다 하니 천하에 장한 무기이옵니다. (329)
다시 다섯 발이 날아와 행궁 담장 밖 길 위에 떨어졌다.
김류가 말했다.
-그러니 본래는 명이 청을 쏘던 무기이옵니다.
임금의 시선이 탄도를 따라갔다. 임금이 말했다.
-경들이 해박하구나 (330)
소설을 읽는 내내, 김류의 모습이 어찌나 익숙하던지. 씁쓸했다. 김류의 후예는 그의 방식을 충실해 답습했고, 여전히 승승장구했다. 김류의 방식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신념을 버린다는 것. 오로지 자기 안위만을 살피며 산다는 일. 박쥐적으로 행동하고,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으며, 난처한 상황에선 바보가 되길 서슴지 않는 김류의 방식. 하지만 필요하면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고(이것도 중요한 김류의 방식이다) 생존을 위해 한순간 타인을 소란의 제물로 삼는 일이 과연 말처럼 쉬울까. 그렇지 않다. 소시오패스처럼 타고난 재능이 없고서야, 김류의 길은 내면의 감정을 돌로 으깨고 짓이겨 스스로 괴로워하길 무수히 반복해야 가능하다. 내면의 고통은 강도가 약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류는?
‘그날 밤 김류는 북장대에 머물렀다. 김류는 혼자서 폭음했다.’ (255)
자신의 책임을 북영 초관에게 넘기고, 중곤으로 팔십 대를 때린 날의 저녁이었다. 김류의 방식을 따르는 건 보기처럼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