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출근할 때면 눈에 들어오는 통유리 카페. 햇살을 머금은 그곳에서 오픈 준비 중인 사장님을 볼 때면 회사 가기 참 싫어진다. 물론 출근길 발걸음이 무거운 게 사장님의 아담한 카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일하기 싫은 게 핵심이다. 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페 사장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덴 이유가 있다. 사장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 벌고 있지 않은가. 덕업 일치. 적어도 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분야가 일이 된다면, 괴로움은 덜해지지 않을까.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출근 때면 카페 사장님의 표정이, 통유리를 타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어렸을 적 명작동화로 만났던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었다. <톰 소여의 모험>. 악동 톰이 학교에서 지내는 생활, 그러다가 겪게 되는 모험이 소설의 기둥 줄거리다. 솔직히 톰이 겪는 모험 그 자체는 나이 마흔을 앞둔 냉소적 독자에겐 시시하다. 사건 전개나 해결도 급작스럽다. 이야기 전개 방식도 전지적 작가의 목소리가 대놓고 설명하는 방식이니, 세련미도 좀 떨어진다. 그렇다면 <톰 소여의 모험>은 어린 시절 읽었던 명작 동화로 충분한 작품일까.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목소리가 있다. 제인 오스틴이나 찰스 디킨슨의 소설이 그랬듯, 마크 트웨인의 목소리는 우리 인생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금언들을 들려준다. 이런 식으로.
톰은 화려한 제복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금주 소년단’이라는 새로운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고 회원으로 있는 동안 담배와 껌은 물론 불경스러운 말도 삼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자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어떤 일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야말로 그 일을 가장 하고 싶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사실을. (P.217)
늘 그렇듯이 변덕스럽고 부조리한 세상인심은 머프 포터를 품에 받아들여 전에 멸시를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인정을 푸짐하게 베풀었다. 하지만 그런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지라 그리 흉볼 것까지는 없다. (P.232)
왜 우리가 스스로의 다짐을 어기는지, 그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마크 트웨인은 설명한다. 그러니까 결심을 어기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심을 하지 않는 일이다. 이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님을 마크 트웨인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종종 비하하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 역시 마크 트웨인은 150년 전에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냉소적이면서도 여유로운 자세란 말인가. 마크 트웨인의 화법이 빚어내는 유머는 특유의 냉소적인 천연덕스러움에서 비롯된다. 톰과 그들의 친구들 역시 초등학생이란 이유로 마크 트웨인의 조롱을 피해갈 수 없다.
집에 있는 물건을 훔쳐 가출을 한 뒤, 무시무시한 해적이 되겠다고 결심한 톰과 조. 하지만 둘은 밤이 되자 그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양심의 공격’을 받게 된다.
값비싼 물건을 훔치는 것은 명백한 ‘도둑질’이며, 도둑질은 성경에서도 금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피해 갈 방법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둘은 이 직업에 종사하는 동안 도둑질이라는 범죄를 저질러 해적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고 나자 양심은 휴전을 받아들였고, 무척이나 일관성이 없는 이 해적들은 평화롭게 잠들었다. (P.144)
마크 트웨인의 유머와 금언이 <톰 소여의 모험>을 읽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한 수 위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직장인이 <톰 소여의 모험>을 읽어야 하는 이유, 바로 소설 속 가장 유명한 장면인, 페인트 칠 에피소드에 있다. 울타리를 페인트로 칠해놓으라는 이모의 지시를, 교묘하게 놀이로 변모시켜, 동네 아이들의 공짜 노동력으로 페인트칠을 끝낸 톰. 친구들에게 받은 온갖 보물은 덤이다. 벌은 하기 싫은 무언가를 강제하는 행위다. 일은 하기 싫다. 고로 일은 벌이다. 톰은 일을 해야 하는 벌을 받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일을 놀이로 바꿔버렸다.
이번 일로 톰은 스스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인간의 행동을 둘러싼 아주 큰 법칙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이 책의 저자처럼 위대하고 현명한 철학자였다면 일은 누가 됐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놀이는 꼭 하지는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쯤 깨달았을 것이다..... 영국에는 많은 돈을 치러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이유로 여름에 말 네 마리가 끄는 여객 마차를 매일같이 20,30마일이나 타고 다니는 부자 신사들이 꽤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차를 타고 다니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일이 될 테고, 그러면 부자 신사들은 당장 그 일을 그만둘 것이다. (P.32-33)
내 출근길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따스한 햇살이 잘 들던 아담한 카페의 사장님도 결국 일을 하고 있었다. 카페 사장님의 아버지가 건물 주인이라면, 그래서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면, 나아가 굳이 카페를 운영하지 않아도 매달 들어오는 임대 수익이 있다고 한다면, 카페 사장님에게 가게 운영은 놀이가 될 수 있다. 경제적 수익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회사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회사를 때려치운다고 해서, 일의 굴레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출근길 앞 낭만적인 카페의 풍경은 마크 트웨인의 덤덤한 지적과 함께 깨지고 만다.
마크 트웨인은 아무런 지적 허세 없이 세상과 삶의 통찰을 드러내기 때문에, 처음 그의 글을 읽으면, 원래 자기가 알았던 내용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 역시 사람들에게 치일 때면 한적한 시골에서 글 쓰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에 빠지곤 했는데, 사실 글이라는 게, 지금처럼 일기 쓰듯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닌, 밥벌이가 달려있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써야 하는 행위라면, 하기 싫은 건 매한가지 아닐까 싶다. 혹시라도 주변의 자유로운 영혼들을 보며 충동적으로 사표를 던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마크 트웨인의 금언을 늘 마음속에 새겨놓을 필요가 있다.
‘일은 누가 됐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놀이는 꼭 하지는 않아도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