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비티 <배반>
「인종 차별이 없는 유일한 곳이 어딘지 알아요?」 그녀는 여대생 동지들이 들리지 않는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더니 속삭였다.「흑인 대통령이 가족과 팔짱을 끼고 백악관 잔디밭을 걸어가는 사진을 생각해봐요. 그 사진 안에, 그 순간에, 딱 그 순간에만 망할 인종 차별이 없어요.」(P.332-333)
내 피에 서아프리카 선조의 DNA가 섞여 있을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 특히 흑인의 설움에 온전히 감정 이입하기 쉽지 않았다. 2016년 맨 부커상을 받은 폴 비티의 <배반>을 읽으면서 어려웠던 건 단순히 흑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만은 아녔던 거다. 사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의 기억. 때문에 흑인의 심정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상황을 역사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로 일반화해봤다. 우리에게도 피해자의 기억은 있으니.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은 폴 비티의 냉소적인 분노가 이해됐다.
뉴스에서 덤덤하게 본 기억은 있다.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2년 전, 흑인이란 이유로 한 청년이 경찰에 살해당했다. 90년대 초 LA폭동 시절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흑인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인종 화합 시대에, 폴 비티는 냉소적인 유머로 가득한 반동적 사회 실험을 시도한다. 주인공 흑인 청년은 사라진 마을 디킨슨에서 1950년대식 인종 분리 정책을 도입한다. 왜 일까.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기만이 덮고 있으면, 해결은 불가능해진다. 니거란 말을 안 쓴다고 상황이 개선된 게 아니다. 결국 폴 비티는 인종 화합의 기만을 21세기 인종분리라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벗기려 한다. (니거란 단어도 엄청 나온다.)
누가 선두에 서서 역사를 기만하는가. 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과거의 치부를 애써 가리려 하는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대부 1>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상대와 화합을 주선하려는 자가 바로 배신자라고. 마찬가지다. 역사의 피해자, 즉 차별의 상처가 가져온 아픈 기억을 애써 지우려는 집단, 바로 가해자다. 시대가 변하고, 피해자 집단이 아픈 기억을 드러낼 때, 가해자의 흑역사가 공개된다. 이 불편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 가해자들은 통합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통합과 미래로 과거를 은폐하고 최종적으로 종결시키려 한다. 피해자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기억을 어떻게 한 순간 사라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분석에 종결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것이 위조된 심리적 개념이라고 했다. 백인 서구인들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상담사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아버지는 평생 연구하고 상담하는 동안 유색 인종 환자가 <종결>을 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복수를 원했다. 그들은 거리를 원했다. 용서와 훌륭한 변호사를 원할지는 모르지만, 종결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살, 살인, 위 밴드 수술, 타 인종과의 결혼, 지나치게 많은 팁을 종결과 혼동하지만, 사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종결이 아니라 삭제라고 했다. (P.357)
하지만 백인들의 기만이 문제를 덮는 전부가 아니다.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더 무서운 건 내부의 적이다. 은폐를 시도하는 가해자는 찾기 쉽다. 하지만 공통의 기억을 가진 내부의 위선과 배신은 구분해내기 어렵다. 실제 폴 비티의 펜 끝은 백인을 향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흑인들, 그가 ‘늑대니거’라고 표현한 인물들이 타깃이다. 나는 그들을 피해 판매자라 부른다. 생계를 위한 직업적 운동가들. 혹은 이념 상인들. 그들은 집단의 악몽을 실용적으로 활용해, 개인의 이득을 챙긴다. 다른 말로 기회주의자라고도 한다. 가해자는 사실 전선이 분명해서, 피해자를 뭉치게 만든다. 반면 피해 판매자들은 종종 내부를 분열시킨다.
미래와 통합을 이야기하는 가해자의 수사학은 조금 어설프다. 기만임을 알아차릴 기회가 있다. 하지만 피해 판매자들은 표면적으로 같은 편이다. 그들의 행동은 나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맥락을 읽어야, 그들의 진상이 드러난다. 예를 하나 들자면, 예전 파업을 할 때다. 그때 보도국 간부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노조엔 엄청난 힘이 됐고, 피디 사장을 결국 몰아냈다. 함께 환호했다. 그 뒤, 그들은 더 악화된 구조 속의 간부가 돼 승승장구했다. 당시 그들과 함께 행동했지만 지방으로 쫓겨나게 된 한 간부는 뒤늦게 자신의 선의가 이용당했음을 알고 분통을 터트렸다. 미묘하지만 이런 식인 거다. <배반> 속 포이 체셔 같은.
내가 <늑대니거>라고 부르는 무시무시한 미치광이 흑인 사상가 집단에 속했다. 늑대니거들은 낮에는 유식하고 점잖지만 보름달이 뜨고, 회계 분기가 되고, 대학의 종신 재직 심사가 있을 때마다, 목 털을 꼿꼿이 세우고, 바닥까지 닿는 털 코트와 밍크 숄을 걸치고, 송곳니를 기르고서, 상아탑과 기업 회의실에서 내려와 도시 빈민 지역을 배회한다...(중략)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적으로 갈가리 찢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특히 싫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아무개 형제니, 아무개 자매니 부르는 습관이다...(중략)「왜 당신네 니거들은 여기서는 그렇게 흑인 방언을 쓰다가, 텔레비전만 나가면 켈시 그래머는 저리 가라 표준말을 쓰는 겁니까.」(P.136)
<늑대 니거>의 핵심이자, 흑인판 로베스피에르를 꿈꿨던 포이 체셔는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고전 새로 쓰기 작업을 진행한다. 소설 속 가장 웃긴 장면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속 ‘니거’란 단어를 ‘전사’로 바꾸고, ‘노예’란 단어는 ‘검은 자원봉사자’로 바꾸는 걸 시작으로, <톰 아저씨의 콘도>, <호밀밭의 포인트 가드>, <흑인 노인과 곰돌이 푸>, <측정된 유산>, <미들 마치 사월 중순, 네 돈을 가지겠다-맹세한다> 등을 완성한다. 그에게 흑인이란 정체성은 개인적 권력을 획득하는 좋은 수단이며, 때문에 흑인 지위 향상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포이 체셔는 대표적인 내부의 적 유형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적을 분간해야 할 때가 많은데, 참 쉽지가 않다 보니, 종종 뒤통수를 맞게 된다. 특히 격년마다 파업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적을 잘 분간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범 가해자 유형은 쉽다. 과거의 문제를 들추고 쑤실 때마다, 미래와 통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건 거의 백퍼센트다. 통합은 청산과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반면 비티가 늑대 니거라 부르는 유형은 구별이 어렵다. 나름의 분간 방법을 꼽자면, 너무 뜨겁고 거창한 사람들, 그러니까 역사와 정의 같은 큰 단어를 즐겨 쓰는 사람은 경계한다. 이념 상인들에겐 알맹이보다 보여지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집단 속 포이 체셔를 찾아내는 게 적을 분간하는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