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제목은 기억 안 난다. 강신주 책을 읽는데, 어찌나 자유롭게 살라고 강조하던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스트레스를 부르는 것처럼, 빨리 자야 한다는 생각이 수면을 방해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강조가 자유를 옥죄는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서점에 갔더니,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라, 자유롭게 사는 인생 같은 책이 넘쳐난다. 슬슬 짜증이 난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자유롭게 사는 인생이란 걸까. 회사 때려치우고 비행기 표 끊어 아이슬란드 가서 오로라 구경하면 자유로운 삶이 완성되는 것일까. 아니면 밥벌이의 비루함에서 해방되는 삶을 의미하는 걸까.
스무 살 때 니체에 빠졌었다. 그가 설파하는 자유의지에 매료됐다. 네 삶의 주인이 되어라. 네 안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라. 그때도 역시 자유롭게 살라는 금언이 강박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자유롭지 못했다. 니체의 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받아들이고 감동했기 때문일지도. 20대에 내가 니체에 열광하던 모습이나, 지금의 자유로운 삶 열풍이나 모두 척추가 빠진 느낌이다. 이유는 밀란 쿤데라가 ‘두 번째 눈물’이라고 표현했던 키치에 있다. 키치적 자유. 한 미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자유 대신 그 자리에 자유를 추구하는 대견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갖다 놓는 SNS용 자유랄까.
진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있다. 얼핏 보면 당혹스러운 인물, 뫼르소. 엄마의 죽음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눈이 부신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뫼르소는 일종의 신화적 인물이다. 카뮈가 서문에서 밝힌 뫼르소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P.141)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한다고 믿어지는 것, 오랜 시간 인류가 기억하고 있는 핵심 이미지들, 상상 속의 질서, 쿤데라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했던 모든 것이 키치다. 때로 우린 그 키치에 순응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느낀다. 뫼르소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미국 판 서문, P.141-142)
뫼르소는 사람을 죽여서 사형을 선고받은 걸까. 아니면 엄마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아서 사회적 단죄를 당한 걸까. 재판장의 검사들은 엄마의 죽음 앞에서 냉담했던 뫼르소에게 ‘정신적 존속 살인’이란 뉘앙스의 표현까지 쓰며 그의 두 번째 죄를 비난한다. 그는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감정적 믿음-엄마가 죽으면 아주 슬퍼해야 한다-을 따르지 않았고, 이에 사회는 그를 억압한다. 문득 한국의 곡 문화가 떠오른다. 외할아버지가 90이 넘어 돌아가셨을 때, 이모들은 물론 슬퍼했다. 하지만 입관 직전, 이모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빛으로 동의를 확인한 후, 연극적으로 곡을 하던 모습은 당시 내게 충격이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방식대로 엄마를 추모했다. 양로원의 장례 의식대로 슬퍼하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양로원의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매일 저녁 그 풍경을 봤을 엄마를 떠올렸다. 양로원 주변의 집 풍경을 통해 엄마를 이해한 셈이다. 뫼르소는 인생의 허무함을 잘 알고 있으며, 엄마의 장례식이 인생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키치적 감정에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는 지금의 느낌과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과거의 감정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때문에 뉘우침도 뫼르소에겐 낯선 감정이다. 그는 철저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며 살았다. 단지 그 방식이 사회의 믿음과 달랐을 뿐이다.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거리로부터, 다른 방들과 법정들의 모든 공간을 거쳐서,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 소리가 나의 귀에까지 울려온 것만이 기억에 남아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닌 삶, 그러나 거기서 내가 지극히 빈약하나마 가장 끈질긴 기쁨을 맛보았던 삶에의 추억에 휩싸였다. 여름철의 냄새,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떤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옷차림, 그곳에서 내가 하고 있던 부질없는 그 모든 것이 목구멍에까지 치밀고 올라왔고, 나는 다만 어서 볼일이 끝나서 나의 감방으로 돌아가 잠잘 수 있기를 고대할 뿐이었다. (P.117)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인데, 이건 책을 읽고 과학 지식을 얻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유는 우리가 터득할 수 있는 어떤 법칙이 아니다. 한 철학자는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고 말한다. 즉, 자유는 사후적으로 증명될 문제일 뿐, ‘착하게 살라’는 말처럼 사전적으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는 게 아니란 의미다. 결국 자유롭게 살라고 강조한 책을 읽으며 느꼈던 불편함,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가져온 부자유는 모두 키치적 자유-자유로운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키치는 인간 본성의 한 요소라, 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이란 모든 형태의 키치를 거부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될 수 있다. 키치의 왕국에서 벗어만 난다면, 비행기 표를 끊고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구경하던,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일상에 파묻혀있던 중요하지 않다. 모든 형태의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니체가 괜히 아이 같은 삶을 이야기한 게 아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중략)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