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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을 피하는 방법

E.L 닥터로 <다니엘서>

by 알스카토

첫 만남부터 경계하는 유형이 있다. 단정적 종결어미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 모든 행동에 자기 확신이 가득한 유형. 자신감 있는 태도와 다르다. 자기 확신은 삶을 편하게 해준다. 다만 확신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확신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측면에서 확신은 유용하지만, 관계의 측면에선 걸림돌이다. 지나치게 확신적인 사람을 피하는 까닭이다. 종교적 믿음의 태도를 세속적 영역으로까지 끌고 나오는 소수의 종교파를 제외한다면, 내가 가장 경계하는 확신범은 ‘역사’를 입에 달고 사는 역사파다. ‘역사가 심판할 것’이란 그들의 말은 기독교 ‘최후의 심판’ 논리 구조와 동일하다.


E.L 닥터로의 <다니엘서>는 1950년 냉전시대에 스파이로 몰려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로젠버그 부부는 아이작슨 부부로 변형돼 소개된다.) 소설은 로젠버그의 아들 다니엘(허구적 인물이다)의 주관적 기억으로 이뤄진다. (객관적 기록이 아니다!) <다니엘서>는 또 다른 유대계 작가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은연중에 난입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한 가정의 이야기다. <미국의 목가>에선 역사가 딸의 방에 침입했다면, <다니엘서>에선 부모를 납치해갔다. 소설 속 주인공 다니엘은 태어나자마자 역사가 은밀한 침실까지 들어와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걸 견뎌야 했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고통스러운 사춘기에 그와 그의 여동생이 암묵적으로 폴과 로셸 아이작슨은 신뢰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신뢰를 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결정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떤 견해를 가지든 그건 역사의 작동 과정일 뿐이었다. (P.101)


다니엘의 부모 폴과 로셸은 공산주의자다. 그들은 역사를 믿는 사람이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가 진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들 다니엘이 바라보는 부모의 실제 삶은 그들의 믿음처럼 굳건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아버지를 ‘그는 실천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일상에서의 혁명적인 삶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실천 정치의 이해는 너무나 큰 믿음의 열기에 용해되어 있었다’(P.290)고 꼬집는다. 어머니의 이념을 두고도 다니엘은 ‘그녀의 정치학은 할머니의 종교처럼 현재의 끔찍한 삶에 대한 저항이자 미래의 디딤대와 같은 것이었다’(P.70)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자였던 부모의 삶은 그들의 이념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그것은 희생자로 살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들의 가난, 그들의 실패, 그들의 불행,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삼류 가문을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들은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내 부모에게 사회정의의 추구는 부러움의 감정을 세상에 대한 건설적인 증오심으로 바꾸어 분출하는 수단이었다. (P.55)


폴과 로셸의 행동이 주변에 어떻게 보였을지 예상해본다. 전형적인 역사 확신범의 태도였을 거다. 자신을 제 외한 나머지는 진리의 빛을 경험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태도에 거만함이 잔뜩 묻어났을 게다. 부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던 민디시의 딸이 다니엘에게 말한 사실-자신들(폴과 로셸)이 원하는 대로 운전사로 부려먹거나 심부름을 시키거나 이빨을 고치게 하거나-에서도 유추 가능하다. 지하에 세 들어 살던 흑인 윌리암슨 역시 아이작슨 집안에 격이 있는 사람은 공산주의를 몰랐던 다니엘의 외할머니뿐이라고 말한다. 폴과 로셸은 역사적 진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을 잘 몰랐다.


한 마디로 폴과 로셸은 밥맛 없는 유형이었다. 허나 그게 전기의자에서 목숨 잃을 만한 잘못은 아니다. 확신에 가득 찬 개인은 멀리하면 그만이다. 사회가 확신에 차면 모든 인간의 삶은 위태로워진다. 다니엘의 부모가 확신에 찼을 때, 마침 미국 사회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예민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어설픈 확신. '혹시 당신의 의견과 상반된 의견 때문에 화가 난다면 이는 곧 당신이 자신의 견해에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한다는 증거다. 만약 2 더하기 2는 5라거나 아이슬란드는 적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느낄 것이다.'라는 버트란드 러셀의 말처럼 미국의 확신은 토대가 허술했다. 때문에 미국은 강력한 분노를 표현했다. 매카시즘의 시대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우리의 대외정책은 우리는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고 소련은 가지지 못했다는 데 전적으로 의존했지. 지독한 오판이었어. 그 사살이 세계를 무장시켰지. 그리고 소련이 핵을 가지게 되자 우리의 지도력과 국가적 전망이 파탄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대안은 불법 공모를 색출하는 것뿐이었고. 양자택일의 문제였지. (P.328-329)


다니엘은 부모가 믿던 확신에 냉소적이었지만, 그의 화실은 분노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못한 채, 자신의 부모를 사법 살인한 미국 사회를 향한다. 미국의 확신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부모의 사건을 주제로 논문을 쓰던 다니엘은 성경의 일부인 ‘다니엘서’를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 논문을 쓰지 않았다. 다니엘은 확신을 경계한다. 오히려 모든 역사는 일종의 허구라고 믿는다. 실제 작가인 닥터로는 ‘소설가가 유일하게 정직한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최소한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어떤 제도의 수호와 관계없는 독립적인 증인이기 때문이다’ (P.466)


다시 자기 확신으로 돌아가자. 개인에게 자기 확신은 편한 도구다. 확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대신 확신은 상황에 맞는 대처를 어렵게 한다. 확신이 있더라도 상황에 맞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자기 성찰이 작게는 충돌을 막고, 크게는 비극을 막는다. 자기 성찰은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은 포착하기 어렵다. 신도 포착하기 어렵다. 혁명의 도덕성도 포착하기 어렵다. 정의도 그렇다. 인간성도. 담배 자판기에 쓸 25센트짜리 동전도.’ (P.71) 누적된 자기 성찰이 확신의 토대를 흔든다. 그것이 단 하나의 이념으로 해석되지 않는 복잡한 인간을 이해하게 돕는다. 폴과 로셸의 변호인이었던 소설 속 나의 영웅 제이크 애셔처럼.


애셔는 내 부모의 공산주의를 애처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용기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애셔는 인간과 권력의 실질적인 현실세계에 무지한 부적응자 유대인인 동시에 무신론자 공산주의였던 아빠 같은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유대인의 전통을 부인하고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는 완벽주의자의 꿈을 꾸면서도 자신을 유대인으로 여기는 사람을 애셔는 이해할 수 있었다. (P.179)



* 폴과 로셸은 모든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2008년 한 소련의 스파이는 폴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스파이었음을 고백했다. 로셸은 스파이가 아니었고, 부부의 아들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어머니의 무죄를 밝혀달라고 청원하기도. 다만 원자 폭탄 설계도를 소련에 넘겼다는 폴의 혐의는 거짓으로 판명 났다. 그가 빼돌린 정보는 전파 탐지기 관련이 전부였다.

(인물세계사-로젠버그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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