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브라우티건 <임신중절-어떤 역사 로맨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면, 세상은 거대한 교수대가 되고 말 거야. (P.71)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문체는 무덤덤해서 더 서글프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브라우티건의 소설 속 세상은 모든 게 일상처럼 단조롭다. 끔찍한 가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헤어 나올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평범한 일상처럼 기록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정적으로 차분하다. 브라우티건의 인물들은 슬픔의 단계를 지나 절망을 거쳐 무덤덤이란 종착역에 도착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가난과 죽음도 그들에겐 새삼스럽지 않다. 브라우티건의 재기 발랄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서글픈 까닭이다. 브라우티건은 무심하지만 집요하게,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상실이다. 그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는 송어 낚시로 대표되는, 순수했던 미국적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이야기했다면, <임신중절-어떤 역사 로맨스>는 순수했던 가치가 사라져 가는 순간을 기록한다. <임신중절>의 주인공은 기묘한 도서관의 사서다. 아무도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 도서관. 대신 그곳은 세상에서 거부당한 모든 책을 수집한다. 주인공은 3년 동안 도서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아름다운 여자 친구 바이다가 임신하면서, 비로소 그는 멕시코 티후아나로 향한다. 일종의 임신중절 여행. (당시 미국은 임신중절이 불법이던 시절이었다.)
주인공은 31살의 소년이다. 그는 도서관을 찾는 ‘고객과 책으로 하여금 자기네를 원한다는 느낌을 갖도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출판사들이 원하지 않는 서정적이고 신들린 것 같은 미국의 저술을 모은 일’(P.99)이 기묘한 도서관의 존재 이유다. 도서관은 브라우티건이 자주 이야기하는 순수의 공간이다.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어른의 세상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꿈의 전당이다. 누군가 그 책을 평가하고 인정하는 건 중요치 않다. 책을 썼다는 행위 자체만으로, 즉 꿈을 실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의미가 생긴다. 그러니까 월급도 받지 않고 도서관에 머무르는 주인공은 아직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지 않았다.
캔턴 리의 <놈들>.
저자는 일흔 살 정도 된 중국 신사였다.
“서부 소설이지.” 그가 말했다. “말 도둑 이야기야. 난 서부 소설을 좋아해. 그래서 내가 직접 써보기로 했지. 안 될 것 뭐 있어? 피닉스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삼십 년을 허비했는데.” (P.31)
여자 친구 바이다의 임신중절을 위해 나온 바깥은 도서관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공항과 스튜어디스는 기계적인 환대로 그들을 맞이하고, 승객들은 매니큐어 이야기로 한 시간을 보낸다. 모두를 사로잡는 바이다의 아름다움은 몇 센트 부족한 팁 앞에서 광채를 잃는다. 티후아나의 병원에서 임신중절은 약국에서 타이레놀을 사거나 소화제를 사는 것처럼 사소한 일이다. 의사는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지만 진정성이 배제된, 무의미한 중얼거림이다. ‘“통증은 없어요. 무통이지요. 무통이에요” 의사는 긴장한 채 부르는 유치원 노래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P.182) 계산의 세계에서 순수함은 멍청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바이다는 거기 서서 우리가 자기 배를 놓고 흥정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바이다의 얼굴은 창백한 여름 구름 같았다.
“예 그것밖에 없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의사가 내 손에서 그걸 받아갔다. 그는 세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은 다음, 다시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 있는 내내 그는 의사로 남아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 의사가 아니었다. (P.180)
임신중절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돌아왔지만, 사서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다. 주인공은 순수의 세계에서 추방됐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른의 세계, 계산과 합리의 세계로 쫓겨난 셈이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주인공에게도 찾아왔다. 모든 순수는 필연적으로 훼손된다. 동굴에서 평생 은둔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른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파블로프의 개처럼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해야 함을 깨닫는 일이다. 바꿔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진정한 욕망이 곧 순수다. 아무도 읽지 않는, 곧 지하실로 옮겨질 운명의 책을 필사적으로 쓰고 도서관에 맡기는 일처럼.
우리에겐 순수의 흔적이 의식 너머에 남아있다. 브라우티건의 이야기가 씁쓸한 건, 그가 끊임없이 독자의 흔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 마흔에 순수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되돌아가서도 안 된다. 대신 순수의 복원을 위해 인생의 아주 작은 공간을 확보할 수는 있겠다. 계산과 효용의 법칙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수한 유희의 공간.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라도, 별다른 후회나 죄책감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순수한 욕망을 위한 자리. 그게 내게는 소설 읽기다. 소설을 읽고, 그곳에서 비실용적 자기계발 정보를 끌어내는 일. 업무와 무관한 기록을 부지런히 남기는 이곳은 나만의 기묘한 도서관이다.
잿빛 구름이 가득 찬 날이었지만 우리는 바깥의 밝은 빛에 놀랐다. 모든 것이 갑자기 시끄러워졌고, 자동차들은 엉켜 있었고, 혼란스러웠으며, 사방은 가난했고 피폐했으며 멕시코식이었다.
나는 그동안 타임캡슐 속에 있다가 세상으로 풀려난 기분이었다. (P.199)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상상력 넘치는 비유는 때로는 맥락이 없지만, 그래서 쾌감을 불러온다. 독실한 수도사의 금욕주의적인 마음가짐으로, 타임캡슐 속 순수의 공간에서 일체의 실용주의적 욕망을 몰아내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