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하지 않는 방법

E. L 닥터로 <래그타임>

by 알스카토

경주마처럼 시야를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나 같은 유형의 인간들은 내 업무와 연관 없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 날은 어쩐 일이었을까. 복도에서 마주친 청소 아주머니와 기계적인 목례를 주고받은 뒤, 가로질러 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청소 아주머니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일까. 나도 그 자리에 서서 지켜봤다. 아주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티셔츠를 만졌다가 내려놓더니 잠시 정적. 아주머니는 복도에 떨어진 커피 흔적을 맨손으로 훔쳐냈다. 화장실로 다시 가서 휴지를 가져올 것인가, 그냥 티셔츠로 닦을 것인가, 아주머니는 복도에 떨어진 커피 얼룩에 잠시 고민을 했던 거다. 결국 그분은 프로페셔널답게 손으로 닦는 방식을 선택한 거고.


나 같이 빨리 걷는 사람에게 그 광경은 꽤 인상적이었다. 아주머니의 철두철미한 직업의식 때문에? 아니다. 손으로 커피 흔적을 훔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보다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내가 보지 않았던 많은 아주머니들은 청소 도구가 없는 순간에도 회사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이 곡은 빨리 치지 말게. 래그타임은 절대 빨리 치면 안 돼.....’ 닥터로의 소설 <래그타임>은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모든 시선이 큰 그림만 조망할 때, 좀 더 천천히,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 시대의 분주함을 보여준다.


1900년대 초,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던 그 시기, <래그타임>은 당시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구성된 작품이다. 소설 속엔 위대한 탈출 마법사 해리 후디니를 비롯,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칼 융, 금융인 J.P 모건, 포드 시스템을 도입한 헨리 포드,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건축가 스탠퍼드 화이트, 흑인 정치인 부커 워싱턴이 콜하우스로 대변되는 허구의 이야기에 뒤섞여 등장한다. ‘니그로는 없었다. 이민자도 없었다’(P.14)는 문장처럼 위대한 미국의 시대는 니그로와 이민자를 보지 않았다. 닥터로는 실제와 허구의 절묘한 경계를 통해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던 무명의 역사를 서술한다.


철마다 짐마차들이 거리를 다니며 부랑자 시체를 수거했다. 밤이 깊어지며 바부시카를 쓴 할머니들이 시체보관소에 와 남편과 아들을 찾았다. 시체들은 양철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성조기를 자기 몸처럼 아꼈다. 돌을 쪼아 길에 깔 포석을 만들었다. 노래를 불렀다. 농담을 했다. (P.25-26)


담배 농장의 니그로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뱃잎을 따면서 하루에 열세 시간을 이하고 시간당 6센트를 받았다. 아이들이라고 차별 대우를 받진 않았다. 아이들을 고용한 곳에서는 오히려 어른보다 더 쓸모 있다고 여겼다.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고용주들은 아이들을 행복한 요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했다. 아이들을 쓰는 데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지구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P.50)


애초부터 닥터로는 역사가들이 기록한 역사를 불신한다. 역사는 만들어진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미 <다니엘서>에서 로젠버그 부부 스파이 사건을 재구성해 냉전 이후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닥터로는 <래그타임>에서도 ‘미국인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각인된 과거의 이미지나 신화를 해체하고 역사에서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부각한다.’ (역사의 재기술과 인식의 민주주의) “역사는 일종의 허구로서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앞으로 생존하기 바라며, 허구는 일종의 사색적인 역사 혹은 초역사로서 그것을 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역사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 출처가 많고 다양하다”는 그의 말처럼, 닥터로는 소설가를 자처하며 미국의 역사를 새로 기록한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허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로버트 피어리의 탐험이다. 로버트 피어리는 에스키모가 삶이라고 불렀던 생활 방식을 탐험의 체계로 도입한다. 그 체계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 탐험가가 피어리의 탐험을 위한 루트 개척에 나선다. 그들이 개척한 길을 따르다가, 마지막 남은 160킬로 미터를 피어리가 직접 개척하는 방식, 그게 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탐험가의 체계였다. 위대한 탈출 마법사 해리 후디니는 목숨을 걸고 탈출 마법을 선보였지만, 그건 당대 부유층의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 후디니는 어쩔 수 없는 광대였기 때문이다.


그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후디니는 사기꾼이고 눈속임꾼이며 단순한 마술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극장을 걸어 나온 뒤 후디니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후디니의 인생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문 가판대의 신문 1면에는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현실 세계의 연기란 역사책에 들어가는 종류의 것이었다. (P.107)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역사가들의 개인적인 욕망, 그들이 세상을 기록한 속내를 역사서라는 텍스트로 읽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역사에 덧씌워진 이상과 신화를 해체하려는 닥터로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역사가 중시하지 않았던 흑인, 여성, 이민자를 주목하려 했던 걸까. 아니다. 오히려 닥터로는 신화 너머 이야기를 통해 진짜 역사를 단순히 보여주기보다는 그 속에서 나뒹구는 인간의 실체를 드러낸다. “사람들이 사실을 원한다면, 나는 그 사실을 그들이 결코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보여줄 생각이다.”란 닥터로의 말처럼 그가 보여준 사실엔 역사적 기록을 넘어 선 인간 본연의 모습이 담겨있다.


문학적으로 재탄생된 역사 속에서 니그로와 이민자, 그리고 이름 없는 약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삶이 모이면 곧 역사가 된다. ‘과거가 현재를 제어’한다는 닥터로의 말처럼 <래그타임>이 보여준 새로운 과거의 이야기는 오늘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선을 교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 내가 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을 일을 하는 사람들, 그래서 결과를 위해서라면 무시당해도 괜찮다고 여겨졌던 사람들. 갑질은 그렇게 탄생한다. 갑질의 시대에 우리가 <래그타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행사하는 갑질을 막아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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